시 - 필사 316

가장 위험한 동물 / 이산하

가장 위험한 동물 이산하 몇년 전 유럽여행 때 어느 실내동물원을 구경했다. 방문마다 사슴, 늑대, 사자, 악어 같은 동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마지막 방문에는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라고 깊이 새겨져 있었다. 호기심에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은 텅 비었고 정면 벽에 커다란 거울 하나가 걸려 있었다. 내 얼굴이 크게 비쳤다. 시집 에서

시 - 필사 2021.07.19

백백홍홍난만중 / 오봉옥

백백홍홍난만중(白白紅紅爛漫中)* 오봉옥 창문을 열었더니 마당에 알록달록한 별들이 떨어져 있었다 엄마별들 사이에 드문드문 애기별도 눈에 띄었다 저 별은 누가 살았기에 붉은 가슴을 가졌을까 저 별은 무슨 꿈이 남아서 아직도 노란 옷을 입고 서성거리는 것일까 저 별은 무엇이 서러워 오도 가도 못하고 상복을 입은 채 앉아있을까 사랑을 앓는 이는 붉은 별이 되고 꿈꾸는 이 노랑별이 되고 못견디게 그리운 자는 죽어서 흰 별이 되는 것일까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백백홍홍난만중 *판소리 춘향가에 나오는말, 하얗고 붉은 꽃이 만발하게 피었다는 뜻

시 - 필사 2021.07.14

무허가 / 김계수

무허가 김계수 버스 정류장 25시 편의점 앞 함양댁 식당이 헐리고 있다 함양댁 허리둘레 같은 무허가 기둥이 헐린다 김씨가 내일 새벽 공사판 일만 있었더라면 박씨가 한 병 더 마시자는 김씨의 부탁을 들어주었더라면, 길 잃은 고양이가 김씨에게 늦은 저녁을 구걸하지 않았더라면, 소주병을 비울 때마다 높아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좁다란 평상이 평평하게 잡아주었더라면, 함양집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더러 사람의 품과 품에도 함부로 낯선 정이 드는 법인데 이까짓 무허가가 무슨 대죄냐고 땅을 두르리며 함양댁이 말했다

시 - 필사 2021.07.09

길을 내다 / 김계수

길을 내다 김계수 밭둑 드나드는 자리 키 넘어 자라 달아오는 살딸기나무 오가는 나를 염려하여 길 쪽으로 뻗은 가지 서넛 잘라내었다 붉어지기 전 살 올라 두툼한 노랑, 다음 날 다시 밭을 오르니 잎과 가지는 쪼그라져 말라가고 내 염려를 벗어났던 노란 열매가 잘렸던 가지에서 익어가고 있다, 빨갛게 그 잘린 가지와 잎에서 밤새 끌어모았을 수고로 기어코 붉게 영그는 나에게는 그저 웃자란 가시였을 저것이 가만히 붉게 살아가고 있다 그 마른 가지 옆으로 다시 길을 내었다 시집에서

시 - 필사 2021.07.09

ㅅ / 윤은영

ㅅ 윤은영 어릴 적 나는 늘 나무를 거꾸로 뒤집어놓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늘과 땅이 뒤집히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서기는 반에서 글시를 제일 잘 쓰는 아이 서기는 나만 할 수 있는 나에게만 뜨거운 직책 서기는 꼭 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단단한 뜻을 가진 동사의 명사형 나는 서기에 임명되어야만 했다 위독했던 할머니를 뒤로하고 개학 전날 서기가 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할머니는 개학날 돌아가셨고 나는 서기를 포기하기 싫어 장례식을 포기했다 과연 나는 나쁜 사람일까 서기가 되면 매일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의 눈길을 받을 수 있어 도망간 엄마 나를 내팽개친 아빠를 잊을 수 있어 학교는 기쁨 학교는 늘 서 있는 곳 꿈에서 내 심장을 갈라 보았다 시옷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새겨놓은 것인지 태어날 때부터 새..

시 - 필사 2021.07.09

그냥 나무 하나 / 조현석

그냥 나무 하나 조현석 그냥 나무 하나 유심히 바라본다 그냥 나무 하나 새들이 떠난 빈 둥지 바라본다 그냥 나무 하나 고개 꺾어 꼭대기쯤 바라본다 그냥 나무 하나 끄트머리 없는 구름 한 점 없는 창공 바라본다 양쪽으로 끝없이 늘어서 메타세쿼이아 중 가장 높아 우뚝한 그냥 나무 하나 곁에 두고 왼쪽으로 돌아본다 그냥 나무 하나 곁에 두고 오른쪽으로 돌아본다 그냥 나무 하나 끝자리 저무는 하늘을 바라본다 그냥 나무 하나 뒤덮는 어둠 뒤집어쓰고 앉아본다

시 - 필사 2021.07.05

통 큰 아내 / 권영옥

통 큰 아내 권영옥 빼내다와 관계되는 연상 언어에는 진절머리가 들어 있다 참나무 뿌리와 뿌리 사이에 작은 바위가 끼어있어 죽어가는 노인의 억지 과신처럼 아내의 발부리가 시커멓게 주저앉는다 뽑아내고 빼내야 한다는 한 생각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고통은 죽음과 연결된다는 걸 안다 함백산 아랫동네에 사는 노인이 겨울을 나는 동안 눈바람이 되셨다. 영정 앞에는 가족과 가족의 합의 없이 만난 한 여인이 다리를 뻗친 채 울고 계신다. 여기에 오기 전 그녀는 참나무에 제 식의 조등을 걸어놓고, 붉은 가넷반지 위에 검은 눈물을 떨어뜨리셨다. 느슨해진 부부 속에 끼어들어 그녀가 화염방사기로 한 가슴을 새까많게 태우셨다 빈소의 촛불이 광기로 출렁이던 그때처럼 이글이글 한 지점을 향한다 불나방의 굴광성을 본 아내는 바닫을 꽉..

시 - 필사 2021.06.07

육감 / 이정록

육감 이정록 출발점이 중요하다며 아빠는 우리 관계를 무시한다 첫 만남이 수준 떨어지게 오락실이 뭐냐며 피시방이라고 게임하다가 만난 게 아니라 수행평가 때문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이상한 눈으로 혀를 찬다. 아빠는 한 핏줄이라서 육감적으로 안다며 용돈이 넘쳐나서 오락실까지 다니다고 엄포를 놓는다. 살이 맞닿는 우산 하나로 엄마를 꼬신 아빠는 육감부터 사랑일 시작된 까닭에, 그때 그 짜릿한 감촉이 이성 교제의 잣대가 됐다. 다 너를 위해서 충고한다는, 라떼는 비닐우산처럼 뒤집히지도 않는다. 하여튼 출발점이 중요하다. -웹진 《문장》 2021년 6월호

시 - 필사 2021.06.07

국경을 넘는 일 / 하태성

국경을 넘는 일 하태성 불가리아에서 세르비아로 가는 국경 길게 늘어선 입출국 검문소에서 총을 든 국경수비대의 눈빛은 삼엄하다 승용차 밖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죄를 지은 것도 없고 잘못 살아온 것도 아닌데 심장이 벌떡이고 손이 떨렸다 여기서 잘못되면 돌아가지도 못하리라 스산한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오는데 좁은 통로에 난데없는 누렁이 한 마리 어슬렁거리며 국경을 넘는다 불가리아에 있는 강아지에게 젖 물리고 세르비아 국경수비대에 몸을 비벼댄다 여권 없이도 국경을 넘나든다 사람들이 가로질러 놓은 경계는 개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개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선이다 개들에게만 있는 권리이다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는 여권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는 국경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는 분단 나는 단 한 번도 걸어서 국경을 넘던 기억이 ..

시 - 필사 2021.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