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316

진부한 시 / 하태성

진부한 시 하태성 아내는 내 시가 진부하다고 한다 밥 먹다가도 티브이를 보다가도 젊은 사람드의 정서와 맞지 않다고 영화를 보다가도 타박을 늘어놓는다 60년대 농촌 이야기라고 70년대 공장 이야기라고 삶의 질이 바뀌고 생활이 윤택해졌는데 아직도 잘린 손가락과 공장에서 쫓겨난 이야기뿐이라고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인데 정보의 바다를 건기도 헤엄치기도 버거운데 아직도 진부한 노동자의 이야기와 농부들의 이야기뿐이라고 돈만 있으면 두 시간이면 서울에서 부산을 가고 유럽도 별나라도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 아직도 잘린 손가락과 해도당한 노동자 얼굴 그려가며 귀동냥 풍월로 남의 이야기만 시대의 양심처럼 오래한다고 돈도 되지 못하고 시대의 양심은 더더욱 되지 못하는 잘려나간 손가락이 없어지고 해고 위협에..

시 - 필사 2021.06.04

사람들에게 묻는다 / 하태성

사람들에게 묻는다 하태성 작가회의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내 친구 '이설야' 시인은 작가가 되기 위해 잉크젯 프린터 두 대를 작살내며 열심히 시를 썼다 신인상 시상식에서 시인이 되려면 그렇게 하라고 치열하게 글 쓰라며 고마운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잉크젯 프린터 두 대를 작살내고 신인상에 당선 되는 세월 동안 나는 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했다 그녀가 자판 앞에서 수려한 탈고를 하는 돌안 내 인생은 어수룩한 문장처럼 두 번 탈바꿈되었고 세 번째 인생 또한 흐릿하다 사람들에 묻는다 누가 더 치열하게 살았나? 누가 더 詩的으로 인생을 노래했는가? (시집 에서)

시 - 필사 2021.06.04

봄밤 / 김수영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시 - 필사 2021.05.22

산밤 / 허정분

산밤 겨우내 먹겠다고 욕심껏 주워 온 눈에 띄는 대로 수탈의 표적이 되어 김치 냉장고서 겨울을 난 산밤을 깐다 미라처럼 생이 정지된 어리고 말랑한 밤벌레의 주검 어느 모태가 슬어 논 유전자의 보금자리였을까 한 생을 일용할 약식이었건만 서서히 굳어가는 추위와 맞서 굴을 파고들며 버티던 생애도 비정한 추위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었듯 썩어서 먹을 수 없는 산밤 내다 버리며 소나무 먹는 송충이나 밤을 먹는 밤충이나 헛 욕심에 눈먼 나도 식충이처럼 평생을 먹거리 포로로 끌려간다는 생각에서 오싹 전율하고 말았다

시 - 필사 2021.05.12

슬픔에게 / 권혁소

슬픔에게 권혁소 무지 때문이 아니라 희망에서 비롯된다 모든 슬픔은 처음이라는 기대와 마지막이라는 애절함이 슬픔의기원이었음을 알았을 때 너도 나도 다시는이라는 단서를 달아 각오를 한다, 이제 더는 희망 같은 거와 속삭이지 말자고 그럴 때 삶은 주저앉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슬픔의이면에는 어떤 단단함도 있어서 신발을 꺾어 신고서라도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나아간다, 생애 첫 다른 흔적을 남기며 그대 차가운 손을 덮히던 어떤 온기 같은 것 슬픔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슬픔아 부디 오래오래 머물러다오, 슬픔 너는 희망의 다른 이름 아니더냐 시집 에서

시 - 필사 2021.05.04

니 똥 굵다 / 권혁소

니 똥 굵다 권혁소 주둥이를 피해 산골로 왔는데 여기도 주둥이는 난무한다 강변 축제를 준비하는 구미동의 겨울 누구는 땔나무를 자르고 솥단지를 걸고 국밥을 퍼 나르고 눈물 질금거리며 화톳불을 피우는데 젖은 나무르 잘랐다고 무쇠솥이 아니라고 남들 눈도 있는데 돼지 뼈가 뭐냐고 연기가 너무 난다고 구두코에 내린 재를 바지춤에 닦는 주둥이, 여기도 있다 우리는 1번에 도장 찍는 기표기가 아닌데 누가 불렀나 저들 1번 군수, 1번 부의장, 1번 도의원, 1번 군의원 소개하는 주둥이와 소개받은 주둥이가 번갈아 마이크를 잡는다, 그래 니 똥 굵다 엄청 굵다 팽이치기, 제기차기, 썰매 이어달리기 국밥 말아 어르신들 대접하고 진차 마당 정리하는데 어디로 갔나, 똥 굵은 주둥이들 시집 에서

시 - 필사 2021.05.04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며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흐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느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웁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시 - 필사 2021.04.30

아름다운 책 / 공광규

아름다운 책 공광규 어느 해 나는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에서 책상이 아니라 식당에서 등산로에서 영화관에서 노래방에서 찻집에서 잡지 같은 사람을 소설 같은 사람을 시집 같은 사람을 한 장 한 장 맛있게 넘겼다 아름다운 표지와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체온이 묻어나는 책장을 눈으로 읽고 혀로 넘기고 두 발로 밑줄을 그었다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최고의 독서는 경전이나 명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참 아름다운 책 한 권

시 - 필사 2021.04.30

오래된 농담 / 천양희

오래된 농담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 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그늘보다 몇 평이나 뚱뚱해져서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 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아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시 - 필사 2021.04.30

술렁이는 오월 / 권영옥

술렁이는 오월 권영옥 모란은 수직을 달리는 꽃불 뜨거운 감옥이다 벌의 더듬이가 꽃잎 속으로 들어오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깨에 접이식 통을 달고다닌다 통통한 입술을 좋아하니? 그 밤에 꽃불 타는 소리가 대단했다 벌이 긴 시간 동굴을 헤치면 발바닥은 낡고 꿀이 빠진다 오래된 향기 화단 한쪽에서 꽃잎이 떨어진다 어젯밤 모란의 염문이 뿌려진 정원에는 개미 떼가 분주하고, 한낮이 돌아오자 벌의 날개는 작약을 향해 비행을 준비한다 미망인 그녀는 조용히 커튼을 친다

시 - 필사 2021.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