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315

저문 별도원(別刀原)에서 / 고은

저문 별도원(別刀原)에서 고은 이 유월의 유동나무 잎새로써 그대 금도(襟度)는 넓고 유연하여라 저문 들에는 노을이 단명(短命)하게 떠나가야 한다 산을 바라보면 며칠째 바라본 듯 하고 나만 저 세상의 일을 알고 있는 양 벌써 조천(朝天)거리 들쥐 놈들은 바쁘고 낮은 담 기슭에 상치는 쇠어간다 제 모가지를 달래면서 소와 말들이 돌아가서 차라리 마주수(馬珠樹) 꽃을 싫어하며 빈 새김질을 하리라 이제 저문 어린애 제 울음을 그친 쪽으로 나에게는 하나이던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이어서 저 조천(朝天) 세화(細花) 께 하현(下弦)달 하나만이라도 밤 이슥하게 떠올라 나를 자주자주 늙게 하거라

시 - 필사 2022.08.18

별들의 시간 / 이윤학

별들의 시간 이윤학 지척에서 보았던 그 사람 얼굴을 잊고 살았다 고개를 들고 바라본 그 사람 눈동자 고운 입김으로 그 이름 부르기 위해 겨울 산 정상에서 흐흡을 가다듬었다 새벽하늘은 망설임의 통로를 헤매다 발견한 그 사람의 확대된 눈동자였다 그 사람 이름 속으로 불러보면 소멸한 은하가 다시 태어나 뜨거운 피가 돌고 설렘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눈물이 번지지 않는 혹한의 시간 글썽이며 흩어진 별들의 파편을 그 사람 눈동자로 돌려주기 적당한 시기 수편의 별들이 수직의 별들로 바뀐 시간을 거슬러 그 사람에게 돌아가기 적당한 시기 이 세상에서 살기 불가능한 별들을 그 사람을 닮은 새벽별들을 그 사람의 눈동자에 파종한 적이 있었다

시 - 필사 2022.07.15

농부 / 이윤학

농부 이윤학 초등학교 졸업 후 그는 줄곧 농부였다 폐암에 걸린 지금도 그는 농부로 살아간다 스무 날이 남았다고도 한다 이제 열흘이 남았다고도 한다 그보다 더 안 남았다고도 한다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농부여서 모자를 쓰고 토시를 낀다 장화를 신고 여름 담배밭에 들어가 담뱃잎을 따 리어카에 싣는다 그는 새카많게 말랐지만 안마당까지 리어카를 끌어다 놓을 힘은 남았다 그는 마루에 드러누웠다 일어나 안마당에 전깃불을 밝힐 것이다 담뱃잎을 엮어 비닐하우스에 널 것이다

시 - 필사 2022.07.14

음모 / 임후남

음모 임후남 방을 쓸다 음모를 만났다 한번 구부러져 다시는 펴지지 않는 인생 같은, 누구도 잡아당겨 펴주지 않는 인생 같은, 엎드려 있다 저 혼자 튀어나온 인생 같은, 근대 누구의 것인가, 저 음모는 누구를 향한 음모인다 방바닥 여기저기에서 솟아오르는, 치워도 치워도, 여기저기에서 투어오르는 내 인생에 함부로 끼어드는 저 음모들은 당당한 음모들 사이에서 무안하기만 한데 분노조차 못하도록 길들어진 나는 누눅든 발꿈치 올려들고 방바닥을 쓸어낸다

시 - 필사 2022.07.09

배롱나무 / 이면우

배롱나무 이면우 배롱나무 붉은꽃 피었다 옛날 배롱나무 아래 볼 발갛게 앉았던 여자가 생각났다. 시골 여관 뒷마당이었을 게다 나는 눈 속에 들어앉은 여자와 평생 솥단지 걸어놓 고 뜨건 밥 함께 먹으며 살고 싶었다 배롱나무 아래 여자는 간밤의 정염을 양 볼에 되살려내는 중이던가 배롱나무 꽃주 머니 지칠줄 모르고 매달 듯 그토록 간절한 십년 십년 또 오년이 하룻밤처럼 후딱 지 나갔다 꽃 피기 전 배롱나무 거기 선 줄 모르는 청년에게 말한다 열정의 밤 보낸 뒤 배롱나 무 아래 함께 있어봐라 그게 정오 무렵이면 더 좋다 여자 두 뺨이 배롱나무 꽃불 켜고 쳐다보는 이 눈 속으로 그 꽃불 넌지시 건너온다면 빨리 솥단지 앉히고 함께 뜨건 점심 해 자시게!

시 - 필사 2022.06.27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질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스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메어 올 적이며..

시 - 필사 2022.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