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96

낙치설(落齒說) / 김창흡

나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읽지 못한 책이 많으니 이제부터라도 만년의 세월을 보내기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흥얼흥얼 글이나 낭독하려 한다. 그리하여 깜깜한 길을 촛불 하나로 밝히듯 인생의 근원을 음미하려 하는 바이다. 그래서 책을 펴고 읽기 시작하자 이가 빠져 벌어진 입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마치 깨진 종소리 같아서, 바르고 느린 마디가 분명하지 않고 맑고 흐린소리가 구분되지 않으며 소리의 높낮이도 분간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낭랑한 목소리를 내려고 하였으나 결국 소리가 말려들어 가고 만다. 나는 쓸쓸히 읽던 책을 덮어 버렸다. 그러자 마음은 점점 게을러져 갔다. 인간의 근원을 찾으려는 이 마음을 무엇으로 유지한단 말인가? 이것이 이가 빠지고 난 뒤에 ..

산문 - 필사 + 2024.02.20

외도의 추억 / 최민자

외도의 추억 최 민 자 시詩도 공산품이라는 사실을 제작공정을 보고서야 알았다. 문화센터 한구석 큼큼한 가내공장에서 숙련된 도제와 견습공들이 시의 부품들을 조립하고 있었다. 누군가 앙상한 시의 뼈대를 내밀었다. 곰 인형이나 조각보를 마름하듯 깁고 꿰매고 잘라 내고 덧붙이며 간간이 웃음과 농담도 섞으며 정성스레 매만지는 손길들이 골똘하고 따스했다. 시는 머릿속에서 튕겨 나오는 게 아니고 몸속 여기저기를 흘러 다니다가 손끝으로 감실감실 새어 나오거나 앞 문장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절름절름 걸어 나오는 거라고, 스티치 위에 인두질을 하고 반짝이 가루를 도포하던 장인匠人이 말했다. 얼추 완성된 시제품 위에 그가 냉큼 새 라벨을 붙인다. 털도 안 뽑힌 살덩어리에서 비계를 발라내고 근육과 뼈가 엉긴 곳에 섬세한 칼끝을..

산문 - 필사 + 2024.01.14

전편의 마지막 장면 / 안병태

전편의 마지막 장면 안병태 내가 뭐 별말이야 했다고? 한창 잔소리에 몰입해 있다가도 손님이 방문하거나 전화벨이 울리면 목소리를 번개같이 두 옥타브나 떨어뜨리고 소프트 톤으로 나긋나긋, 사뭇 딴 사람으로 돌변하기에, “사람 목소리가 어쩌면 저토록 순식간에 변할 수 있을까!?” 새삼스럽게 경이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비아냥거린 죄밖에 없어. 나는 탤런트와 동거하는 게 아닌지 가끔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니까? 뿐이야? 방문객과 나직나직 기품 있게 담화를 나눈 뒤 고샅까지 배웅하고 들어왔거든, 낭창낭창 통화를 끝내고 미소 머금은 표정을 아직 지우지 않았거든 그것으로 상황을 종료해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지 않겠어? 그런데 아까 중단한 잔소리 ‘다음 편에 계속’ 즉 ‘전편의 마지막 장면’을 잊어버리지도 않고 다시 두 ..

산문 - 필사 + 2023.03.23

좋은 수필을 쓰려면 / 맹난자

좋은 수필을 쓰려면 맹난자 수필은 산문이다. 산문은 뜻글이다. “물건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듯 글을 쓰려면 뜻을 써야 한다.” 이것은 중국 문장가 소동파의 말이다.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다. 우리가 편지 한 장을 쓸때에도 말의 앞뒤와 차례를 생각하거늘 어찌 문학 작품에 있어서이랴. 발레리는 시를 춤에 비유하고 산문(수필)은 ‘도보徒步’에 비유한 적이 있다. 시는 목적 없이 흥겨우면 춤을 추지만, ‘도보’는 의도된 행선지를 따라 길을 걷는다. 수필의 경우에 의도된 행선지란 쓰고자 하는 글감의 주제의식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짧은 형식의 글이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주제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① 주제에 대하여 주제나 제재는 글속에 하나만 있는 게 좋고 주제는 자신이 감당..

산문 - 필사 + 2023.03.05

양잠설養蠶說 / 윤오영

양잠설養蠶說 -윤오영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훤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 방에서 누에가 풀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었다. 이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며 엿 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안기(催眼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식을 해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산문 - 필사 + 2022.11.08

곶감과 수필 / 윤오영

곶감과 수필 윤오영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柿)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복숭아나무라 하고 뙈기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 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 못 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 한 데..

산문 - 필사 + 2022.11.08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 김 현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김현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변화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

산문 - 필사 + 2022.07.25

습독신어론 / 채선후

습독신어론(習讀新語論) - 수필, 이어 온 것이 없다 채선후 오랜만에 같이 등단했던 문우와 연락이 닿았다. 등단 이후 작품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던 터라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한때 열의를 가지고 글을 쓰던 모습이 참 예뻤던 문우였다. 어찌 된 일인지 등단 후 작품 발표가 없어 소식이 궁금했었다. 그녀 말은 합평을 받을수록 회의가 들고, 쓸수록 겁이 나서 펜을 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현재 수필 문단은 수필을 모른 채 흘러가고 있다. 수필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조차도 잘 모른다. 서양문학 어느 장르 언저리쯤 되는 이론으로 겉치장만 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 수필을 붓 가는 대로만 쓰면 되는 줄 안다. 어찌 되었든 수필 작품에는 작가 목소리가 진솔하게 담겨 가장 자기다운 글인 것은 확실하다..

산문 - 필사 + 2022.06.26

T 1000과 청개구리 / 조후미

T 1000과 청개구리 조후미 나는 청개구리다 내가 청개구리임을 미리 밝히는 이유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나 때문에 열 받거나 혈압이 올라 뒷목을 잡을 수도 있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이유에서다 과거의 나는 빨간 불에 멈추고 파란 불에 가며 규정 속도를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 몸속 DNA 저 깊숙한 곳에 저장된 청개구리 유전인자가 오랜 시간 은밀하게 숨어 지내다 최근에야 정체를 드러냈다 하라는 일은 하기 싫고 금지된 일은 더 하고 싶어졌다 남의 말은 드럽게 안 듣는 데다 최 씨도 울고 갈 똥고집이 온몸을 친친 감고 도전자들에게 내 고집을 꺾어보라며 치기 어린 강수를 든다 한때는 웰빙이 대세였고 최근에는 욜로와 미니멀 라이프가 여러 매체에서 오르내리지만 아 뭐래 나는 복세편살하련다 이런 ..

산문 - 필사 + 2022.06.16

황홀한 노동 / 송혜영

황홀한 노동 송혜영 ​ 그들이 왔다. 긴 머리를 야무지게 뒤로 묶고 왼쪽 귀에 금빛 귀걸이를 해 박은 대장을 선두로 그들은 우리 마당에 썩 들어섰다. 젊은 그들이 마당을 점령하자 이끼 낀 오래된 마당에 활기가 넘쳤다. 대장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재며 장비를 풀어놓았다. 그리곤 진군하듯 헌 집을 접수해 나갔다. ‘두두둑’ 오랜 세월 소임에 충실했던 노쇠한 양철지붕이 끌려 내려왔다. 이가 빠진 창문도 급히 몸을 빠져나왔다.. 제 구실을 못한 지 오래된 굴뚝이 뭉개졌다. 마당 가득 유월의 때 이른 폭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마로, 귀 뒤로, 싱싱한 뒷덜미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셔츠의 등판은 금세 땀에 젖어 몸에 척 들러붙었다.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이른 무더위가 내 탓인 것만 ..

산문 - 필사 + 2022.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