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92

양잠설養蠶說 / 윤오영

양잠설養蠶說 -윤오영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훤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 방에서 누에가 풀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었다. 이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며 엿 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안기(催眼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식을 해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산문 - 필사 + 2022.11.08

곶감과 수필 / 윤오영

곶감과 수필 윤오영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柿)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복숭아나무라 하고 뙈기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 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 못 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 한 데..

산문 - 필사 + 2022.11.08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 김 현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김현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변화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

산문 - 필사 + 2022.07.25

습독신어론 / 채선후

습독신어론(習讀新語論) - 수필, 이어 온 것이 없다 채선후 오랜만에 같이 등단했던 문우와 연락이 닿았다. 등단 이후 작품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던 터라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한때 열의를 가지고 글을 쓰던 모습이 참 예뻤던 문우였다. 어찌 된 일인지 등단 후 작품 발표가 없어 소식이 궁금했었다. 그녀 말은 합평을 받을수록 회의가 들고, 쓸수록 겁이 나서 펜을 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현재 수필 문단은 수필을 모른 채 흘러가고 있다. 수필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조차도 잘 모른다. 서양문학 어느 장르 언저리쯤 되는 이론으로 겉치장만 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 수필을 붓 가는 대로만 쓰면 되는 줄 안다. 어찌 되었든 수필 작품에는 작가 목소리가 진솔하게 담겨 가장 자기다운 글인 것은 확실하다..

산문 - 필사 + 2022.06.26

T 1000과 청개구리 / 조후미

T 1000과 청개구리 조후미 나는 청개구리다 내가 청개구리임을 미리 밝히는 이유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나 때문에 열 받거나 혈압이 올라 뒷목을 잡을 수도 있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이유에서다 과거의 나는 빨간 불에 멈추고 파란 불에 가며 규정 속도를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 몸속 DNA 저 깊숙한 곳에 저장된 청개구리 유전인자가 오랜 시간 은밀하게 숨어 지내다 최근에야 정체를 드러냈다 하라는 일은 하기 싫고 금지된 일은 더 하고 싶어졌다 남의 말은 드럽게 안 듣는 데다 최 씨도 울고 갈 똥고집이 온몸을 친친 감고 도전자들에게 내 고집을 꺾어보라며 치기 어린 강수를 든다 한때는 웰빙이 대세였고 최근에는 욜로와 미니멀 라이프가 여러 매체에서 오르내리지만 아 뭐래 나는 복세편살하련다 이런 ..

산문 - 필사 + 2022.06.16

황홀한 노동 / 송혜영

황홀한 노동 송혜영 ​ 그들이 왔다. 긴 머리를 야무지게 뒤로 묶고 왼쪽 귀에 금빛 귀걸이를 해 박은 대장을 선두로 그들은 우리 마당에 썩 들어섰다. 젊은 그들이 마당을 점령하자 이끼 낀 오래된 마당에 활기가 넘쳤다. 대장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재며 장비를 풀어놓았다. 그리곤 진군하듯 헌 집을 접수해 나갔다. ‘두두둑’ 오랜 세월 소임에 충실했던 노쇠한 양철지붕이 끌려 내려왔다. 이가 빠진 창문도 급히 몸을 빠져나왔다.. 제 구실을 못한 지 오래된 굴뚝이 뭉개졌다. 마당 가득 유월의 때 이른 폭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마로, 귀 뒤로, 싱싱한 뒷덜미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셔츠의 등판은 금세 땀에 젖어 몸에 척 들러붙었다.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이른 무더위가 내 탓인 것만 ..

산문 - 필사 + 2022.05.12

네 손의 기도 / 조동우

네 손의 기도 조동우 돌아가신 할머니와 비슷한 연배였던 그 환자를 처음 만난 건 면허를 따기 전이었던 2016년 여름, 한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수술실에서였다. 당시 나는 교수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며 책에서만 보던 것들을 실제 임상 현장에서 배워나가던, 막 병원 실습을 시작한 본과 3학년 학생이었다. 외과계 실습을 돌면 수술을 참관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주어지곤 한다. 수술에 절대 방해가 되지 않게끔 떨어져 있되, 생생한 현장을 하나라도 눈에 더 담으며 배우는 것. 수술을 참관하는 실습 학생의 가장 큰 덕목은 ‘적극적인 병풍’이 되는 것이다. 내가 참관했던 수술은 고령의 암환자에게서 자궁을 들어내는 비교적 큰 수술이었다. 수술실 한구석에서 산부인과 레지던트 선생님 옆에 서서 마취가 시작되기를 기다..

산문 - 필사 + 2022.05.12

수필의 올바른 정치학 / 이운경

수필집 자세히 읽기 수필의 올바른 정치학 - 노정숙, 《피어라, 오늘》 (도서출판 북인, 2021) 이 운 경 1. 잘 숙성된 성찰의 산물 노정숙의 다섯 번째 수필집 《피어라, 오늘》은 현대수필의 전형典型과도 같은 책이다. 수필의 본질에 입각한 다양한 형식의 작품이 다 들어있다. 이는 저자가 수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수필쓰기를 이어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열매가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다. 역사 속 인물과의 대화, 여행기, 일상에서 길어 올린 삶의 일리와 철학,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생각, 짧은 수필과 실험 수필 등등. 현대수필은 이러한 것이다, 라는 명제에 대한 실전작품을 다 모아놓았다. 이 책은 등단 이력 22년이라는 긴 세..

산문 - 필사 + 2022.03.14

제1회 구지가문학상 수상 소감 -조정인

제1회 구지가문학상 수상 소감 ​ 내 안에 웅성거리는 무수한 타자들​ ​구지가(작자미상)는 주술성이 강한 역동적인 노동요입니다. AD 40~50년 경, 김해 구지봉에서 신(神)의 계시가 들려와 모든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신의 말씀대로 흙을 파헤치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노래를 불렀다 해요. 300여 명의 군중이 춤추며 발을 구르고 노래를 부르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로 싼 금빛 그릇이 내려왔다지요. 그릇에는 6개의 황금알이 담겼는데 알들은 6명의 귀공자로 변했다지요. 귀공자들은 각각 6가야의 왕이 되었고요. 그 중 제일 큰 알에서 나온 귀공자가 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이라고 합니다. ​ ​아득한 시간성 속에 고고한 숨을 내쉬는 신화의 한 가운데, 구지가가..

산문 - 필사 + 2022.01.21

피가지변(皮哥之辯) / 피천득

피가지변(皮哥之辯) 피천득 ‘皮哥가 다 있어!’ 이런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皮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 두터운 전화번호부에도 皮가는 겨우 열이 될까 말까 하다. 현명하게도 우리 선조들은 인구 소동이 날 것을 아시고 미리부터 산아 제한을 해왔던 모양이다. 皮가가 金가보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다. 우간다 사람에게는 닥터 김이나 닥터 피나 다 비슷하리라. 그래도 왜 하필 皮씨냐고? 옛날에 우리 조상께서 제비를 뽑았는데 皮씨가 나왔다. 皮가도 좋지만 더 좋은 성(姓)이었으면 하고 다시 한 번 뽑기를 간청했다. 그때만 해도 면 직원들이 어수룩하던 때라 한 번만 다시 뽑게 하였다. 이번에는 毛씨가 나왔다. 毛씨도 좋지만 毛는 皮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셨기에 아까 뽑았던 皮를 도로 달래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대대로..

산문 - 필사 + 2021.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