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낙치설(落齒說) / 김창흡

칠부능선 2024. 2. 20. 23:38


나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읽지 못한 책이 많으니 이제부터라도 만년의 세월을 보내기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흥얼흥얼 글이나 낭독하려 한다. 그리하여 깜깜한 길을 촛불 하나로 밝히듯 인생의 근원을 음미하려 하는 바이다. 그래서 책을 펴고 읽기 시작하자 이가 빠져 벌어진 입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마치 깨진 종소리 같아서, 바르고 느린 마디가 분명하지 않고 맑고 흐린소리가 구분되지 않으며 소리의 높낮이도 분간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낭랑한 목소리를 내려고 하였으나 결국 소리가 말려들어 가고 만다. 나는 쓸쓸히 읽던 책을 덮어 버렸다. 그러자 마음은 점점 게을러져 갔다. 인간의 근원을 찾으려는 이 마음을 무엇으로 유지한단 말인가? 이것이 이가 빠지고 난 뒤에 나의 마음을 가장 슬프게 하는 바이다. 
그동안 겪어 온 인생을 돌이켜 생각해 본다. 내가 비록 늙었다고 하나 몸이 가볍고 건강한 것만은 자신했었다. 걸어서 산에 오르거나 말을 타고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천릿길을 가도 다리가 아프다거나 등이 뻣뻣해지는 일이 없어서 내 나이 또래들과 비교해 볼 때에 누구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해하였다. 그리하여 노쇠한 것도 잊고 건장하다고 자부하였으며, 어떤 일을 당하여도 겁내지 않고 달려들어 처리하였으며, 마음이 내키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달려갔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곤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벌여 놓은 일이 너무 많아서 수습할 수 없게 되자 나는 내 몸을 이 시골구석에 숨겨서 평생 문 밖에도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마치 버릇처럼 되어서 저녁이면 후회하면서도 아침이면 다시 되풀이하여 일을 벌이곤 하였다. 이는 자신이 할 일에 대해 나이에 따라 표준을 세워 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지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모두들 놀라고 또 내 처지를 슬퍼할 것이니, 내 아무리 잠시나마 내가 늙었음을 잊으려고 한들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제부터라도 나는 노인으로서 분수를 지켜야겠다. 
옛날 성인들의 예법에 사람이 예순 살이 되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군대의 일에 종사하지 않으며, 새삼스레 학문과 친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예기(禮記)] 를 읽었으나 여기에 대한 이론에는 동의하지 않고 함부로 일을 저지르곤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동안 먹었던 마음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조용히 들어앉아서 만년을 맞이해야겠다. 빠진 이가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옛날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朱子)도 눈이 어두워진 것이 계기가 되어 마음과 성품을 기르는데 전념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되자 더 일찍이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음을 한탄하였다. 아마 그것이 바로 이가 빠진 나의 심정일 듯하다. 모양이 일그러졌으니 조용히 들어앉아 분수를 지켜야 하고, 말소리가 새니 함부로 떠들지 말아야 하며, 고기를 씹기 어려우니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야 하며,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지 못하니 그냥 마음속으로나 읽어야겠다. 
조용히 들어앉아 있으면 정신이 안정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면 실수가 적을 것이며, 부드러운 음 식만 먹으면 복을 온전히 가질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글을 읽으면 조용한 가운데 인생의 도를 찾을 수 있을 터이니 그것의 편리함이 또한 많지 않은가? 그러니 늙음을 잊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는 경망한 자이고, 늙음을 한탄하며 슬퍼하는 자는 속된 사람이다. 경망하지도 않고 속되지도 않으려면 늙음을 편히 여겨야 하는데, 늙음을 편히 여긴다는 것은 마음 내키는 대로 휴식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담담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가 미련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눈으로 보는 감각의 세계에서 초탈하여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 곧 인생을 즐겁게 사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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