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150

황금열반상 외 1편 / 노정숙

황금열반상 노정숙 당신은 모로 누워있었어 원 달러를 내고 당신 발에 머리를 조아렸지 내 소행을 아는 듯 당신은 슬쩍 웃었지 너도 황금 좋아하는구나? ​ 행복요양원 노정숙 탁자 위에 놓인 빵이 며칠째 그대로네 썩고 싶어도 썩지 못하는 빵, 지루한 인생 ​ ​ 2023 겨울호 / 통권 46호 ​ ​ ​ 발행인 김우종 선생님은 1929년생이다. 여전히 표지 그림 그리고, 짱짱한 평론도 발표했다. 건재하심에 감사드린다. ​

추석 전 수요일

테마에세이 / 칭찬합니다 추석 전 수요일 노정숙 매주 수요일은 수필 수업이 있다. 배우는 건 내 장기다. 아는 것을 나누는 것도 배움이라 생각하니 즐겁다. 오랜만에 신입생의 작품을 합평하며 생소한 낱말 검색을 많이 했다. 공부를 부르는 글이다. 하고 싶은 말은 변죽만 울리고 한참 에둘렀지만 그것을 읽어낸다. 어떻게 알았어요? 묻는 말이 순진하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반응이다. 글에서 사람을 분리할 수 없는 고백형 수필은 비평할 때 배려가 필요하다. 글을 써서 내보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흠뻑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기본에서 충분히 의견을 내고 대안까지 제시한다면 비평자의 좋은 자세다. 칭찬하기는 쉽지만 도움이 될 쓴소리를 하기는 어렵다. 내 글에서 보이지 않는 흠을 남의 글에서는 쉬이 찾아낸다..

선각자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 노정숙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0785 [불교인문학살롱] 19. 이탁오와 불교 - 현대불교신문 집 떠나 만리 길 헤매다 낯선 마을에 묵는다외로운 혼백 타향만리 성문 안에 갇혔구나고개 들어 푸른 하늘 즐거이 바라보니커다랗고 둥근 달 온 누리에 비추네 - ‘감옥에서 지은 절구 여덟 수’ 중 세 번째 노래... www.hyunbulnews.com ​ ​ 선각자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노정숙 집 떠나 만리 길 헤매다 낯선 마을에 묵는다 외로운 혼백 타향만리 성문 안에 갇혔구나 고개 들어 푸른 하늘 즐거이 바라보니 커다랗고 둥근 달 온 누리에 비추네 - 〈감옥에서 지은 절구 여덟 수〉 중 세 번째 노래 이탁오의 절명시다. 이탁오(본명 이..

나, 이민진 / 노정숙

나, 이민진 노정숙 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갔다.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후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변호사로 일하다가 건강 문제로 그만두고, 오랜 꿈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필을 써서 출간하고, 대학 3, 4학년 때 논픽션과 픽션 창작 분야에서 일등상을 수상했기에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곧장 소설을 출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다행히 뉴욕에서는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위대한 작가를 연구할 수 있는 풍요로운 문화가 있다. 크고 작은 작가 워크숍과 문화센터, 스와니 문예창작 컨퍼런스 등에 다녔다. 몇 달 뒤 뉴욕예술재단지원금을 받았다. 픽션 부분에서 받은 상금을 내 문예창작 수업에 투자했다. 배..

침대 놀이 / 노정숙

침대 놀이 노정숙 ​ 문우들과 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걸었다. 들길과 산길이 적당히 어우러졌다. 나뭇잎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잘 늙은 나무둥치에 기대어 깊은 숨을 쉰다. 팔랑대는 나뭇잎들은 제 얘기에 바쁘고 팔 벌린 나뭇가지는 새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지리산의 별들을 총총 가슴에 쓸어 담고 입을 벌리면 퐁퐁 별빛으로 빛나는 낱말이 쏟아져 나오는 꿈을 꾼다. 마지막 날 마당에서 바비큐로 저녁을 먹고 난 후, 방에 모여앉아 속을 풀었다. 왜 그들은 나를 슬프게 하는가. 왜 그 사람은 내 맘을 몰라주는가. 왜 영감靈感님은 나를 찾아주지 않나. 글로 뭉치지 못한 말들을 공중에 난사했다. 눈물이 비치기도 하고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하나둘 몽롱해질 무렵, 나는 하늘길펜션 욕실에서 순식간에 넘어지면..

92 퍼센트 / 노정숙

92 퍼센트 노정숙 요즘, 사람들의 말이 잘 안 들어온다. 귀에 이상이 생긴 것인가 해서 이비인후과에 갔다. 귀지가 막고 있는 것은 아니라며 청력검사를 해보자 했다. 방음부스가 설치된 검사실에서 헤드폰을 쓰고 소리가 들리면 버튼을 누른다. 몇 개의 헤드폰으로 바꿔 써 가면서 검사를 했다. 가늘고 긴 음, 투박하고 강한 음이 들릴 때마다 나는 버튼을 눌렀다. 90~100%가 정상범위인데 나는 92%라고 한다. 수치로는 정상에 속하는데 왜 놓치는 말이 많아졌는지. 어음청력검사는 일상의 의사소통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청력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한 번에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아졌다. 내가 듣지 못한 말은 내게 필요하지 않는 말이라고 억지 마음을 먹는다. 이 여우의 신포도 비유는..

수직 상승의 꿈 / 노정숙

특집 :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스승 수직 상승의 꿈 노정숙 어디서 나왔는지 하늘거리는 꽃 사진 아래 쓰인 글에 눈길이 멈췄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늘 불가능해 보인다.’ 활자중독이 맞긴 하다. 침침해진 눈으로도 무엇이건 읽어내려고 애를 쓴다. 사실 내게 가능, 불가능이란 의미가 없다. 좋으면 계속하고 안 좋으면 언제든 그만두면 되는 것이다. 밥벌이가 아닌 일은 자유롭다. 책이 좋아 시작한 글놀이는 소설로 시작했다. 짧게 만나 깊이 알지 못했지만 소설을 합평할 때 맹렬한 분위기에 나는 주눅이 들었다. 집 가까운 곳에서 수필을 만났다. 친근하고 편했는데 수필의 대가이신 운정 선생님은 자꾸 ‘시 같은 수필’을 쓰라고 하신다. 그때부터 시와 수필에 양다리를 걸쳤다. 해독이 필요한 시는 높은 곳에 멀리 있..

제트스키와 백령도

제트스키와 백령도 노정숙 ​ 백령도에서 나오는 날은 바람이 제법 불었다. 전날 유람선 타는 일정이 취소된 걸 보면 제 시간에 떠날 수 있는 것도 다행이다. 2층 맨 앞자리에 앉아서 밀려오는 파도를 즐기는데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요동칠 때마다 비명을 지른다. 앞으로 오라고 했다. 조심조심 앞자리로 나와 앉아 오는 파도를 바라보면서부터 조용해졌다. 멀미로 화장실을 드나드는 사람도 있다. 좀 전에 먹은 아이스크림 탓인지 나도 속이 울렁거려서 앞자리를 포기하고 맨 뒤로 갔다. 뒷자리는 요동이 훨씬 약하다. 처음 간 백령도는 관광지가 아니었다. 섬이지만 어업이 아닌 70% 논농사가 주업이며, 대표음식도 해산물이 아닌 메밀냉면과 메밀칼국수다. 군인이 주민보다 많다. 서울보다 평양이 가까운 서쪽의 땅 끝, 우리 땅을..

고전적 정수기 / 침묵 - 노정숙

고전적 정수기 노정숙 모던한 아파트 주방 안쪽에 둥글넙적한 물항아리가 턱 앉아계신다 아침이면 환하게 엘이디 등불을 물 위에 띄우신다 어미는 고개 숙여 물 한바가지 퍼올린다 저 지극하게 굽은 어미의 등, 모든 어미는 머리 조아리기 선수다 쉿! 조왕신이 기침하신다 침묵 노정숙 반복하는 묵음 연주, 존 케이지의 에 빠졌다. 고요 속에서 내 숨소리와 한숨소리 모든 숨 붙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격렬한 음을 느낀다. 몸 안 톱니바퀴는 곳곳이 헐거워져 느리게 돌아간다. 나는 나사를 조이려 조바심치지 않는다. 낡아서야 벙그는 묵음의 세계, 위로의 손길이 스민다. 2022년 여름호. 통권 40호

성녀와 친구 / 노정숙

성녀와 친구 노정숙 지난주에 친구 자임에게 《아벨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과 온열 양말을 선물 받았다. 솔직히 이런 책은 부담이 간다. 단정한 자세로 읽어야 할 것 같고, 분명 부실한 내 기도생활을 자책하게 될 것이다. 500년 전에 살다간 성녀 데레사가 하느님을 만나며 느낀 환시와 신비를 기록했다. 19세에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고 병고와 회의, 고통을 겪으면서 서서히 기도와 관상의 힘을 깨닫게 된다. 교회로부터 기도 신학의 탁월한 권위자로 인정받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학자가 되었다. 어떤 일을 할 때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실행에 옮기라고 권하는 것은 순정한 믿음에서 나온다고 한다. 아무런 공로도 없이 강력한 은총을 믿는 것 또한 은총이다. 스스로 아무 선행도 한 일이 없고 가난하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