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나, 이민진 / 노정숙

칠부능선 2023. 9. 23. 21:33

 

나, 이민진

 

노정숙

 

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갔다.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후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변호사로 일하다가 건강 문제로 그만두고, 오랜 꿈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필을 써서 출간하고, 대학 3, 4학년 때 논픽션과 픽션 창작 분야에서 일등상을 수상했기에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곧장 소설을 출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다행히 뉴욕에서는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위대한 작가를 연구할 수 있는 풍요로운 문화가 있다. 크고 작은 작가 워크숍과 문화센터, 스와니 문예창작 컨퍼런스 등에 다녔다. 몇 달 뒤 뉴욕예술재단지원금을 받았다. 픽션 부분에서 받은 상금을 내 문예창작 수업에 투자했다. 배우고 연습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이미 두 편의 소설에서 실패를 경험했다. 첫 번째 원고는 출판사에서 거절당했고, 두 번째 원고는 내가 포기했다. 초고를 여러 번 쓰고 나서 독자를 존경하게 됐다. 독자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하다. 그들이 읽고 싶은 글을 써야 한다. 시금치를 먹어야만 하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초콜릿 쉐이크를 마실 때처럼 맛있게 먹혀야 한다.

습관적으로 지하철에서 책을 읽었다. 어느 날 나는 V. S. 나이폴의 책을 다 읽고 그의 찬란한 문학적 성취에 감동해서 눈물을 터트렸다. 그의 정치 견해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비범한 무엇인가를 픽션으로 성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작가는 언제나 먼저 독자가 되어야 한다. 내 생을 통틀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내게 크나큰 위안이다. 픽션을 더 잘 쓰려고 연구할 때 내 본보기는 언제나 읽고 또 읽고 싶었던 책들이었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음식1,2》는 내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미국 이민자로서 겪는 청춘의 열정과 방황, 치열한 삶을 그렸다. 2001년 9월 11일, 9.11 사건을 보면서 그때 희생당한 한국계 미국인 ‘케이시’가 눈길을 잡았다. 나는 911에 단 한 사람의 목숨도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내면에 아름다운 생명력을 품고 살았던 케이시라는 여성과, 뉴욕시에 터전을 두고 살아가는 모든 한국인을 기리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

여행과 쇼핑을 좋아하고 단편소설과 시를 썼다는 그녀, 그의 동생에게 “언니는 한 치의 후회도 없이 살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미 소설을 시작한 상태에서 주인공에게 케이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주제문으로 삼는다. ‘능력은 저주일 수 있다’로 시작하는데, 유능한 젊은 여성 케이시 한이 맨몸으로 부딪치며 뉴욕에서 살아내는 모습을 소개했다. 그는 능력만큼 번듯한 삶과 성공을 선택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기대에 대한 강박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갈망한 것은 독립과 화려함, 로맨스였다. 젊은 몽상가인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뉴욕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실수하고, 실패도 하며 부모님을 차츰 이해하게 된다.

2006년 여름, 첫 소설을 출판 계약했을 때 나는 습작 11년째였다. 2007년에는 영화를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아시아인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해서 무산되었다.

두 번째 소설 《파친코1,2》이다. 역사를 공부하던 시절에 재일한국인을 돕던 백인 선교사에게 13살짜리 재일한국인 소년이 집단 괴롭힘을 당해 투신자살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가 뇌리에 박혀 ‘자이니치’라 불리는 재일조선인에 대해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출간되기까지 30년여 년이 걸렸다.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과 함께 4년간 일본에 머물며 방대하고 치밀한 조사와 취재 끝에 이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작가가 되면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어떤 사항이든 검증된 것이어야 한다.

‘역사가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전체를 관통하는 첫 문장이다. 파친코는 역사의 주인공이 아닌 사람들, 역사의 거대한 회오리에 속수무책인 이민자들이 오직 가족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고투를 그렸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일본 버블경제까지의 흐름 속에서 거친 나날을 이어가는 자이니치 4대의 가족사다. 특정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의 저항정신이 역사보다 숭고하다.

제목 ‘파친코’는 도박처럼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뜻한다. 더불어 혐오와 편견으로 가득한 타향에서 파친코 사업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상징한다.

영어로 쓴 소설 《파친코1.2》는 전세계 27개 국어로 번역되면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애플티비에서 8부작 드라마로도 만들었다. 이민 1.5세대인 나는 경계인의 시선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2007년에 거절당한 아시아인 주인공이 2022년 거대 자본 투자로 미국 가정에 등장한다. 판권을 계약한 20대 후반의 에이전시는 인종차별이 없고 미래지향적이다. 드라마에서 관동대지진 사건을 책에서보다 소상히 알린다. 아시아인이 미국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암묵적 공식을 깼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다가 번쩍 눈을 뜨는 순간이 있다. 강의실의 모든 학생들이 아키코를 경시했지만, 노아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진실을 제시하는 그녀의 용기가 존경스러웠다. 교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아키코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전까지는,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할 줄 몰랐다. 독자들이 노아처럼 진실을 대면할 용기를 얻기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내 목표는 《파친코》를 읽는 세계 사람들이 한국인이 되기를 바란다. 캐릭터, 줄거리, 인식, 반전, 카타르시스를 통해 그들이 한국인의 정서에 몰입하기를 바란다. 19살에 들은 13살 자이니치 소년의 죽음은 50살이 된 지금도 화가 나고 눈물이 난다. 참담한 분노로 시작했지만 모성애로 마친다. 일본은 지금도 역사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니, 세계인이 한국인이 되어 그때의 진실을 느끼게 하고 싶다. 이게 바로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국경을 넘나들고, 잃어버렸던 자신과 재회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평화에 접근하는 방법이라 믿는다.

내가 구상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세 번째 장편소설은 아메리칸 학원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과문학> 2023 가을 • 통권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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