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침대 놀이 / 노정숙

칠부능선 2023. 9. 13. 23:11

침대 놀이

노정숙

 

문우들과 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걸었다. 들길과 산길이 적당히 어우러졌다. 나뭇잎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잘 늙은 나무둥치에 기대어 깊은 숨을 쉰다. 팔랑대는 나뭇잎들은 제 얘기에 바쁘고 팔 벌린 나뭇가지는 새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지리산의 별들을 총총 가슴에 쓸어 담고 입을 벌리면 퐁퐁 별빛으로 빛나는 낱말이 쏟아져 나오는 꿈을 꾼다.

마지막 날 마당에서 바비큐로 저녁을 먹고 난 후, 방에 모여앉아 속을 풀었다. 왜 그들은 나를 슬프게 하는가. 왜 그 사람은 내 맘을 몰라주는가. 왜 영감靈感님은 나를 찾아주지 않나. 글로 뭉치지 못한 말들을 공중에 난사했다. 눈물이 비치기도 하고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하나둘 몽롱해질 무렵, 나는 하늘길펜션 욕실에서 순식간에 넘어지면서 머리를 타일벽에 부딪혔다. 그야말로 하늘길로 직행하는 줄 알았다. 내 긴 목 위에 얹혀있던 머리가 그렇게 무거웠던가. 쇳덩어리 같았다. 목을 조금만 움직여도 찌릿 전기충격 같은 통증이 가격해왔다. 밤새 끙끙대다가 아침에 그곳 읍내 한의원에서 응급조치를 하고 남은 일정을 거두고 일행 모두 올라왔다. 나는 졸지에 민폐녀가 되었다.

찡그리고 다니는 사람을 이해 못했는데 내가 당하고 나서야 그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이 내 말을 안 듣는 순간이 이렇게 황당하게 올 줄 몰랐다. 통증클리닉과 한의원을 다니며 풀코스 치료를 했다. 내 발밑이 안 보여도 더듬더듬 내 발로 걷는 게 어딘가, 습관인 긍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처럼 몸이 먼저 나가면 안 된다는 경고다. 생각과 동시에 내달리는 행동을 멈춰야 할까. 무시로 솟는 호기심을 버려야 할까. 생각만으로도 삶의 질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구 들린다.

그동안은 아픈 것을 ‘무시’한다고 했는데. 이 무시당하지 않는 통증의 강력한 존재감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당분간은 침대를 주무대로 지내야 할 판이다. 옆으로 누워서 최대한 목을 자극하지 않는 자세로 쇼펜하우워의『문장론』을 읽는다. 책도 나와 함께 무게를 침대에 맡겼다. 문장론은 뼈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억센 뼈를 감싼 굳센 근육을 느끼며 내 목에 할 수없이 힘이 들어간다. 불편한 목을 자주 궁굴린다. ‘주장하고 싶은 사상을 읽기 쉽고 정확한 문체로 전하고 있는가. 예리한 지성과 감각을 갖추었는가. 생각할 가치가 전해졌는가.’ 문장론은 문장보다 정신을 채찍질한다. 골계미에 빠지기에는 내 공력이 부족하다. 무딘 글쓰기에도 문법, 논리, 수사를 챙겨야 한다는 지엄한 스승의 직구에 얼얼하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권력이 아니라 철학이라니 그나마 마음을 놓는다. 그러고 보면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지도 모른다. 비판 없는 책읽기는 생각하는 힘을 앗아간다.

지리산에 누워 올려다 본 하늘이 내 침대 위에도 찾아온다. 하늘은 바람과 구름과 별들의 놀이터다. 목은 부동 상태지만, 마음을 활짝 열어 사단칠정이 노닐게 해야 한다. 사단으로 인해 칠정이 일어난다거나 칠정이 사단의 부분집합이라거나 퇴계 선생과 고봉 선생의 갑론을박을 들춰본다. 25살 차이나는 고봉 선생과 8년 동안이나 서신을 주고받으며 토론한 퇴계 선생의 인품을 헤아린다. 감정에 날 세우던 때가 좋았거나 힘들었거나 시간은 흐른다. 시간의 힘에 떠밀려, 어둔해진 몸을 앞세워 눈도 귀도 닫을까 두렵다.

혹독한 값을 치렀지만 별이 쏟아지던 지리산에서의 시간을 생각하면 실실 웃음이 난다. 침대에서 책을 읽다보니 침대 위가 정신없이 흐트러졌다. 오래전, 내게 프랑수와즈 사강의 『흐트러진 침대』를 선물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는 순전히 제목에 끌렸던 것 같다. 제목에서 기대했던 격렬한 사랑 장면 같은 건 그림자도 나오지 않는다. 머리만 분주해지는 책이 꼭 답답한 그 사람 같았다. 그의 어설픈 작업은 불발로 끝났다. 내게 J.갈로의 『사랑의 기도』를 선물한 사람도 생각난다. 그 책에서 「말없이 사랑하여라」는 기도문을 읽고 또 읽으며 초탈한 척, 마음을 다잡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언감생심, 말없이 사랑하는 건 지리산 별보다 먼 성인의 것이다. 성인을 닮은 외모에 잠시 혹했지만 그도 진도를 나가지는 못했다. 시작도 끝도 미미했던 내 연애사다.

총량의 법칙이 있는지 늦바람이 거세다. 그 광풍에 마냥 몸을 맡긴 후반부 시간에 가속이 붙었다. 연륜과 속력이 비례한다는 말은 맞다. 무엇이건 몸 먼저 나가는 걸 보니 그때 못 쓴 것을 몰아서 탕진하는 것 같다. 주로 짝사랑이지만 혼자 몰입하고 절정에 이르기도 한다. 마음에 꼭 드는 책을 만나면 창밖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껴안고 지낸다. 속이 헐렁했던 내 20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지금은 내게 책 한권 선물하지 않고, 아침마다 침대커버를 쫙쫙 펴서 각을 잡는 사람과 단정하게 각방을 쓰며 살고 있다.

뻗정목으로 지내는 동안, 친구와 지인으로부터 음식과 과일을 잔뜩 받았고 염려와 쾌유 기원도 많이 받았다. 마음에 새긴다. 내가 아프거나 말거나 베란다에 방치한 화분에서 꽃이 피었다. 분갈이도 영양제도 준 적 없이 가끔 물만 주었는데 기특하다. 모두 말 없는 위안이다. 목에 힘이 절로 빠지는 날이 오면 나는 칠레팔레 또 길 위에서 바람을 맞을 것이다.

내 침대놀이는 시체놀이에 다다르지 못했다. 아직도 부산스러운 생각이 몸을 따르지 않아 완벽한 휴식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에세이스트> 2023. 09- 10 (통권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