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와 불교>
선각자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노정숙
집 떠나 만리 길 헤매다 낯선 마을에 묵는다
외로운 혼백 타향만리 성문 안에 갇혔구나
고개 들어 푸른 하늘 즐거이 바라보니
커다랗고 둥근 달 온 누리에 비추네
- 〈감옥에서 지은 절구 여덟 수〉 중 세 번째 노래
이탁오의 절명시다. 이탁오(본명 이지李贄)는 명대후기 사상가다. 도전과 진취 정신이 강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사상범으로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면도칼은 그의 인생에서 비장한 도구다. 그를 ‘이단’이라고 배척할 때 면도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유관을 벗어던져 이단이라는 악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감옥에서 면도칼로 항쟁하여 이단을 압제하는 자들의 악명을 완성시켰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자를 위해 죽음으로써 분노를 토하리라’ 그가 일찍이 〈오사편五死篇〉에 썼던 예언을 실현했다.
이탁오는 개인의 행복 추구가 우선이며 사람의 목숨이 충의보다 귀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존경과 예의를 중시하며, 겸손과 자기반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공자의 사상과 부딪친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고 한 것은 통치자를 위한 것이며, 자신의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에 폭정에 시달리면서도 현실체제에 순응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우러를 사람은 예나 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고 어려운 시절을 구제하고 난을 제거한 사람이다.
《중용》에 ‘희로애락이 생기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고 했다. 중中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을 예禮라 하고 밖에서 주입되는 것을 비례菲禮라고 한다. 굳이 배우고 고려하지 않아도 생각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비슷하게 이르게 되는 것이 비례非禮다. 대중은 공자가 말했던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 것不好學’을 쉽게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특별히 주장하는 ‘동심설童心說’은 인간이 사회화되기 이전의 마음이야말로 진실하고 성스럽다고 믿는다. 사회로부터 도리와 견문, 암시가 마음속에 들어오면서 동심이 오염되고 결국 소멸한다고 한다. 독서로 동심을 지켜야 하는데, 송대 이후 독서는 주희의 시선으로 공자 읽기가 모두였으니, 이는 과거科擧를 통해 입신양명하려는 과정이며, 앞서 간 성현을 따라 복창하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개탄한다. 스스로 통제하는 자율과 남에게 책임을 지우는 책중責衆의 문제에서 이탁오는 스스로를 엄하게 통제하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탁오는 26세 때 관리 등용문인 ‘거인’에 합격해 하남· 남경· 북경에서 하급관료 생활을 하다가 40세 때 북경 예부사무의 보직을 받고 많은 현인들과 학문 강론에 합류한다. 예부낭중 서용검이 《금강경》을 보여주며, “이것이 불가의 학문일세. 한번 섭렵해보지 않겠나?”하는 권유를 받자, 그는 가슴이 뛴다. 이때부터 불교 공부의 길로 들어선다.
부처를 말하고 불경을 논하는 것은 이미 문화인의 교양 중 하나가 되었던 때다. ‘일체의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는 믿음과, ‘차라리 영겁 동안 침륜을 당할지언정 성현들을 좇아 해탈을 구하지 않겠다’는 자존, ‘여기 조사祖師가 있느냐, 그럼 불러와서 내 발 좀 닦으라 하라’와 같이 권위에 반기를 드는 기개로 의혹과 확신 사이를 오가며 깊어진다.
그는 5년 동안 예부에 있으면서 도의 묘한 이치에 마음을 담갔다. 왕양명 선생의 문집과 서책들을 읽고 학문을 강론하며 불후를 추구하는 뜻을 세우기 시작했다.
50세에 이르러 이탁오는 특별한 전환기를 맞는다. 드디어 공자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성인에 대해 안다고 스스로 자부하게 되었다. 《성인의 가르침》을 써서 불교 신도에게 ‘도는 영원히 하나일 뿐’이라는 걸 전한다. 이전의 자신은 남들이 짖으면 따라 짖는 한 마리 개, 대중에 불과했다고 회고한다.
이후로 불교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욱 깊어진다. 학문에서 그동안 익숙히 듣고 보아 단단해진 일체의 도리가 골수에서 굳지 못하도록 통렬히 밀어내야 진보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비판의식으로 맹렬히 읽고 쓰면서 이지는 이지가 되어갔다.
그는 예견했다. 자신의 책이 세상에 선보여질 때 자신에게 미치게 될 화가 지금처럼 비난하는 강도에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걸. 그랬기에 책 이름도 스스로 《분서焚書》 불태워버려야 할 책, 《장서藏書》 감추어야 할 책이라고 붙였다.
54세 되던 해 운남의 4품 지부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이 주는 속박감과
4남3녀 자녀 중에 큰딸만 살아남은 불행한 가족사에 번민이 컸을 것이다. 선지식을 찾아보려는 강한 열망으로 겨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벼슬을 놓았다.
그 후 아내와 딸과 사위가 고향으로 갈 때는 수중에 남았던 생활비를 모두 주고 혼자 남았다. 후에 아내 황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의인을 곡하다〉, 〈황의인을 생각하다〉는 시를 연달아 쓰며 불교에 취해 현처를 저버린 일을 참회한다.
62세에 이단임을 자처하며 삭발을 하고 수염은 깎지 않아 다시 논란에 휩싸인다. 지인들과 서신으로 주고받은 생각은 기존 질서에 맞서거나 거스르는 것이었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모두가 측천무후의 행실을 비난하는데, 인재를 아끼고 알아보는 혜안이 있다며 ‘성후’라고 찬미했다. 도덕적 계율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탁오는 실제 사적과 공적을 도덕적 평가보다 위에 놓았다.
어떤 사람이 만나기를 청하자, 성인도 특별히 다른 점이 없으며, 보통 사람들은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성인은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석가가 상대에 따라서 문답 형식이나 비유, 설화를 활용하고 평이한 말로 설법했듯이 이탁오도 만나는 사람들의 눈에 맞춰 말한다.
그러나 이지는 여전히 이지였다. 체면을 세워주려 할 때는 거부하고, 모욕을 주려 할 때는 도리어 기꺼이 받아들인다. 호구에 도움을 주려고 학당에 초대했더니 묵묵부답하고, 거리에서 욕을 보이려는 젊은이들에게 다가간다. “학당에서 강론을 잘하는 것은 앵무새가 남의 말을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려 마시며 즐겁게 노래하고 즐기는 것은 저절로 천기를 얻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탁오가 깨달은 불교는 제도화된 울타리에 한정하지 않는다. 실천하는 불교로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삶 안에서 피어난다. 그는 유교· 불교· 도교 모두가 도를 깨침으로써 세속을 벗어나려는 바람이 같다고 보았다.
67세에는 독서와 저술 이외에 지불상원에 불전을 짓고 불상을 빚는 일을 했다. 그는 현대 예술가 같은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한 보살의 얼굴을 약간 단정치 않게 빚어놓고 이탁오는 볼 때마다 좋다고 찬탄했다. 그러나 이탁오가 현장에 없을 때 승려들이 기술자를 시켜 고쳐놓았다. 그는 이것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고치지 않았을 때는 얼마나 생동감 있고 생기가 넘쳤나! 생동감이 있으면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바로 보살을 잘 묘사한 것이다. 왜 꼭 보기 좋게 고치려고만 하느냐! 보기 좋은 것은 형체이고, 세간의 통속적인 사람이다. 살아 움직이면 정신이 들어간 것이고 출세간 보살승이다. 보기 좋은 것은 외적인 장식을 잘하는 것으로 오늘날 도학의 이름을 빌린 것이 그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진실한 마음과 뜻으로, 스스로 만물을 비출 수 있는 것이지 육안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닭을 찔러 피를 내서 부처의 눈에 칠해 개광開光하는 것을 반대했다. 흙으로 빚은 보살이 정말로 신기한 효험이 있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공경의 뜻이다. 중생의 마음이 산란할 때 그들이 부처를 보고 귀의할 마음이 생기게 하기 위한 것이다.
승려의 직분은 산에서 지낼 때는 염불을 위주로 하며 모든 일에 노련하고 성실히 매진해야한다. 다만 나이 어린 자들은 모두 대중이고 도제며 도손이라 기꺼이 달려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사부는 도제들을 엄히 단속하는 것보다 자연스레 선행하길 바라는 게 좋다고 했다.
그는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한다. 자신의 수발을 해준 승려들에게 무엇을 남겨서 그들의 고생에 보답할 것인가 궁리한다. 병중에도 서둘러 《법화경》 강의를 편찬하여 선배 선사들의 좋은 게愒, 선가의 좋은 시, 유가로서 선에 통한 시를 수백 쪽으로 집성했다. 이 책을 승려들이 매일 저녁 달빛 비치는 창이나 바람 지나는 처마 밑에서 몇 수씩 길게 읊조리며 정진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탁오는 병든 몸을 무릅쓰고 지불원에서 《역경》을 연구하고 명대 인물 전기를 써 나간다. 성현들을 비판하며 현행 도덕의 부당한 조목을 논하고, 영성을 가둔 족쇄를 풀려고 애썼다. 자신은 일생 동안 결벽증이 있어 세상의 모든 술, 색, 재물은 단 반점도 나를 물들게 할 수 없었다. 지금 일흔다섯인데 평소의 행위로 귀신에게 물어보면 귀신은 결코 사람들에게 모두 보이는 이 결점으로 자신을 책망하지는 않을 것이라 단언하며, 깊은 고독감을 오직 읽고 쓰며 견뎌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예견한 듯 유서를 남기고, 세간의 습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의 사후 일정까지 세세히 일러두었다. 그가 일러준 장례 모습은 그린 듯 그대로 이루어졌다. 선각자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두 발 앞 선 사상은 어느 시대나 배척의 대상이다. 핍박받은 그들의 피와 땀으로 우리 문명은 앞으로 나아간다.
이탁오는 76세 되던 해 투옥되었다. 마경륜은 그에게 가해진 ‘이단이 세상을 미혹시킨다, 음행을 선양한다’는 두 가지 죄명을 반박하고 전심으로 변호했다. 그러나 판결이 내리기 전에 그는 스스로 이생을 마치고, 후대의 성자가 되었다.
<현대불교> 2023. 10. 6일 '불교인문학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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