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추석 전 수요일

칠부능선 2023. 11. 15. 22:55

테마에세이 / 칭찬합니다

 

 

추석 전 수요일

노정숙

 

 

매주 수요일은 수필 수업이 있다. 배우는 건 내 장기다. 아는 것을 나누는 것도 배움이라 생각하니 즐겁다. 오랜만에 신입생의 작품을 합평하며 생소한 낱말 검색을 많이 했다. 공부를 부르는 글이다. 하고 싶은 말은 변죽만 울리고 한참 에둘렀지만 그것을 읽어낸다. 어떻게 알았어요? 묻는 말이 순진하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반응이다. 글에서 사람을 분리할 수 없는 고백형 수필은 비평할 때 배려가 필요하다. 글을 써서 내보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흠뻑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기본에서 충분히 의견을 내고 대안까지 제시한다면 비평자의 좋은 자세다. 칭찬하기는 쉽지만 도움이 될 쓴소리를 하기는 어렵다. 내 글에서 보이지 않는 흠을 남의 글에서는 쉬이 찾아낸다. 합평은 이렇게 서로 글과 마음을 갈고 닦아 모난 부분을 다듬는 시간이다.

 

오후에는 편집회의가 있었다. 차를 마시는 중에 휴대폰을 점검하니 김 선생님의 소식이 여행팀 카톡에 떴다. 추석 지나면 호스피스병원에 입원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동안 격려에 감사하며, 편안하게 웃으며 하느님께 가도록 기도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오랜 투병 중 여러 번 기적을 보였기에 한 번 더 희망을 가졌는데 … 기운이 빠지고 머리가 하얘졌다. 행사 앞두고 급해서 잡은 편집회의인데 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 들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고 많은 결정들을 하긴 했다. 오래전, 행사 때마다 김 선생은 사진을 담당해주었는데, 함께 한 시간들이 슬라이드로 이어진다.

추석 장도 보지 않고 허둥지둥 집에 들어와서 김 선생이 수필잡지에 연재한 <나의 암 투병기>를 다시 읽었다. 10년 넘게 암 4개를 극복한 체험기다. 작년 봄호에 시작해서 올해 봄까지 5회로 중단 상태다. 2012년 4월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려 투병 시작한 것을 되돌린다. 그 중 여행도 치유의 과정으로 삼았다. 〈오빤 항암스타일〉, 투병 중에도 여행을 하는 오빠에게 여동생이 한 말이다. 〈설악의 기적〉, 수술날짜를 두 번이나 연기하면서 수술하지 않고, 설악에 푹 안겨 자연 치유의 길을 선택했다. 암이 없어져서 일 년 후에 오라는 판정을 받는 환희를 맛보았다. 얼마 후 재발했으나 〈암에도 꽃길이 있다〉고 믿으며 여행을 꾸준히 했다. 세 번째 발병 판정을 받고도 〈여행이냐 투병이냐〉, 선택 앞에서 늘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다.

처음에는 주로 혼자 여행하고, 치유에 대한 자신만의 보답의 의미로 다녀본 곳 중에 좋은 곳을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안내했다. 그 때 나도 여러 번 동참하여 기도의 응답보다 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내 슬라이드는 10년의 암 투병 과정과 그 이전의 시간까지 한순간에 거슬러 올라간다. 수필반에 처음 오셨던 게 언제인가 까마득하지만 단정했던 모습은 선명하다. 부모님을 돌보러 뉴질랜드에서 왔으며, 수업이 끝나면 점심을 함께 하지 못하고 어머니 병실로 갔다. 그 후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본격 여행자가 되었다. 한국의 산과 섬을 섭렵하고 세계의 섬으로 넓혀나갔다. 몇 해 전 아버님의 부음도 여행 중에 맞아 급히 돌아와 상을 치르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섬이 부른다’는 선생의 블로그는 여행애호가에게 보물창고다. 자신이 다녀온 곳에 대한 정보를 다음 여행자를 위해 소상히 안내한다. 직접 찍은 사진과 해박한 자료들이 놀랍다. 선생의 글을 읽으면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신앙인의 면모가 배어 있었다.

 

여행작가이기도 한 선생과 합평모임을 한 적이 있다. 정직한 직구에 의견을 오해 없이 듣는 데까지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진심은 거칠어도 통하는 법이다. 애쓰지 않고 쌓인 시간에 뿌리가 내린 듯, 든든했다. 글을 쓰면 쓰는 시간보다 고치는 시간이 더 길다. 합평에 내놓고 난 후, 말 홍수에 빠진 글을 흔들어 건져올린다. 듣기 좋은 말은 내게 위로는 되지만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하긴 위로도 필요하다. 어설펐던 부분은 여지없이 지적을 당한다. 뜨끔하면서도 고맙다. 애정 없는 칭찬보다 깊이 있는 매운 소리가 더덕이던 글 때를 벗긴다. 글을 고치며 허리를 세우고 고쳐 앉는다.

선생과 같이 합평하며 글에 군살을 빼고, 함께 여행하며 마음이 풍성해졌다. 빈말이 없고 다정하지 않아서 더 믿음직스럽다. 선생이 이끈 우리나라 섬과 명소들. 시칠리아, 로도스, 몰타, 산토리니 등 이국의 섬까지. 여행팀의 든든한 대장으로 우리 가슴에 영원한 청년이다.

언제든 ‘네’하고 떠나겠다던 오래 전 내 객기를 떠올린다. 김 선생의 육화된 신심을 바라보며 내 마음대로 안도한다. 아쉬움 없이 고독하고, 성심으로 열렬한 삶을 보여준 김선인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을 올린다. 오늘 하루, 나는 저 오랜 인연의 순간들을 애틋하게 이어본다.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던 성가 ‘내일 일은 난 몰라요’가 떠오른다. 지금.

<그린에세이> 3023. 11/12월호 vo.l 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