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천년 고독

칠부능선 2025. 3. 12. 16:46

                                                          천년 고독

 

노정숙

elisa8099@hanmail.net

 

넷플릭스에 <백년의 고독> 이 나왔다. 책으로 읽을 때 엉키던 이름과 환상을 따라가지 못하던 내 상상력이 쉽게 풍경으로 펼쳐졌다. 차례도 순차적으로 바꿔서 이해도를 높였다. 8부작을 새벽 3시까지 단숨에 봤다. 그런데 오래 전 기억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년의 고독1. 2권을 다시 읽었다. 군데군데 접혀있는 책이 새롭다. 생소했던 라틴아메리카 문학으로 콜롬비아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23년 동안 생각하고 18개월 만에 썼다는 7대에 거친 대서사다. 1권의 끝까지도 안 가고 영화는 마무리 지었다. 정치적인 메시지만 전했다. 보수파와 자유파의 각론, 혁명가와 테러리스트가 한 끗 차이다. 한 사람의 앞뒤 얼굴 같다.

주인공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는 사촌이다. 근친상간의 저주와 공포를 안고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다. 그 약점을 건드린 친구를 죽이고 혼령에 시달리다 고향을 떠나 이상적인 도시 마꼰도를 세운다. 공평하고 자유로운 낙원을 건설하고 조상의 이름을 쓰며 이름의 기운대로 산다. 이들의 삶은 흘러가지 않고 반복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죽은 몸이 외로움을 참을 수 없어 돌아와 한참 더 살다 떠나기도 한다. 환상이 사실처럼 길고 긴 쉼표로 이어진다. 인간은 타고난 성정대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들의 생에서 죽음을 주목한다.

외로움이 극에 달한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미쳐간다. 미친 상태에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솟구쳐서 마당 한가운데 밤나무에 묶인 채 살아간다.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났다를 외치며 죽은 자와 손잡고 떠난다.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신세계에 대한 탐구와 고독이다.

처녀로 죽은 아마란따는 자신이 죽는 시간까지 예견하고 스스로 관에 들어가 눕는다.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 살아서도 외롭고, 가족 곁에서 죽으면서도 죽음을 재촉받으며 외롭다.

아울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보수파의 폭압 속에서 반란군을 이끌고 수많은 정부군을 죽이고 전쟁영웅이 된다. 휴전 후 지독한 고독과 한 몸이 되어 머리를 어깨 사이에 처박고 이마를 밤나무에 기댄 채 홀로 삶을 마친다.

삘라르 떼르네라는 백마흔다섯 살이 되고는 나이 헤아리기를 포기한다. 카드 점을 통해 남들의 삶을 예측하고 염탐하며 혼란해져 버린다. 그들의 삶과 한 몸으로 엉켜서 이미 알고 있는 미래 속에서 나직이 죽어가고 있다.

부엔디아 가문을 실제로 이끈 건 우르술라다. 정부가 개입하기 전까지 마꼰도를 통치한 지도자였으며, 120년 이상 살았고 100세 무렵 눈이 멀었지만 가족들도 눈치채지 못한다. 기막힌 통찰력으로 사물의 형태와 거리, 특유의 냄새를 기억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되길 거부했다. 장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신도 잊을 정도였다.

 

가엾은 고조할머니가 늙어서 돌아가셨네아마란따 우르술라가 말했다.

난 살아 있어!” 우르술라가 말했다.

내가 말을 하고 있잖아우르술라가 외쳤다.

말도 하지 않으시고, 마치 작은 귀뚜라미처럼 돌아가셨어아울렐리아노가 말했다.

그때 우르술라는 그 명백한 사실에 굴복하고 말았다.

오 하느님. 그러니까 이게 바로 죽음이란 거로군요

 

지혜롭던 여장부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며, 돌아가신 아버님이 떠올랐다. 요양병원에 계실 때 새벽에 다급하게 전화를 하셨다. 불안한 마음으로 달려갔더니 근엄하시던 아버님은 외로워서라고 하셨다. 그 후 말씀도 못하는 상태로 콧줄과 소변줄을 달고 중환자실에 계실 때는 멀쩡한 나를 왜 중환자실에 가두느냐고 쓰셨다.

지금 생각하니 아버님의 사인死因은 고독이 아니었을까. 더욱이 코로나19 정국이었으니 얼마나 기막혔을까. 아버님은 우르술라처럼 강한 정신력으로 95년 생애의 마지막을 인정하지 않으신 거다. 누구에게나 충분한 시간이란 없다. 이르나 늦으나 모든 죽음은 애통하다.

나는 오십 언저리부터 언제든 부르시면 하고 가겠다고 쓰곤 했다. 어른들과 살면서 저절로 조로早老해진 듯하다. 게다가 외로움은 나의 벗이라던 그때의 치기를 떠올리면 낯이 뜨겁다. 내가 거침없이 무모했던 것도 예바른 어른들 덕이다. 이제 가만히 불러본다. 그때의 호기와 치기를.

책보다 영화는 즉각적이다. 책을 보지 않고 영화만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후 영화를 보고 흡족한 경우는 많지 않다. 글에는 보이는 것 너머를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문자를 숭앙하는 사람은 글의 힘을 믿는다. 그로 인해 미몽에서 깨어나 넓은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덕분에 책을 다시 읽고, 고독은 선천 질환이며 인류력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그 거대한 힘을 피할 수 없으니 얼른 인정하고, 궁굴리며 놀다가 가야 한다.

 

<에세이문학> 2025 봄호 (통권169호)

'수필. 시 -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89세, 고운 손  (3) 2024.12.11
뒷것 김민기를 애도함  (0) 2024.09.06
새롭게 또 다르게 / 노정숙  (4) 2024.07.02
황금열반상 외 1편 / 노정숙  (0) 2024.01.03
추석 전 수요일  (0) 2023.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