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89세, 고운 손

칠부능선 2024. 12. 11. 21:49

89세, 고운 손

노정숙

 

 

광역버스를 탔는데,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분이 나를 옆에 앉으라고 이끈다. 자리에 앉고 보니 곱게 모은 손에 메니큐어가 예사롭지 않다. 보라색에 은빛 반짝이가 도드라져 눈길을 끈다. 손톱 손질 어떻게 하셨냐고 물으니 심심해서 직접 했다고 한다. “멋지세요.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하니 손을 모아주신다. 가운뎃손가락에 보라색 빨간색 보석이 줄줄이 박힌 반지도 반짝인다. 보라색을 좋아해서인지 외롭게 살았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모자도 코트도 보라색이다.

지금 89세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1살에 결혼해서 5녀 1남을 두었는데 남편이 41살에 저세상을 갔다고 한다. 돈 벌며 자녀들을 혼자 키웠다. 사는 게 힘들었지만, 자녀들이 모두 결혼했고 손자녀가 13명이라고 한다. 지금은 아들네랑 산다. 함께 사는 며느리 숨통 트라고 자주 외출을 하신단다.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콜택시를 불러 버스정류장까지 와서 서울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신다.

자잘한 꽃무늬가 빵빵하게 부푼 배낭을 연다. 한참 뒤적거리더니 도톰한 빨간 장갑과 지퍼백에 담긴 간식 봉지를 주신다. 사양했으나 당신의 기쁨이라며 받으라고 하신다. 버스 기사에게도 하나 드렸단다.

그날 만나는 친구들에게도 각각 요긴한 것을 준비한다. 밥 차리기 싫어하는 친구에게는 물만 부으면 되는 즉석식품을, 화장 안 하는 친구에게 선크림과 간단한 화장품을 선물한다.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돈인데 친구들 밥 사주고 이렇게 소소한 선물을 건네는 게 얼마나 좋으냐고 하신다.

하이네 시를 좋아하고 요즘은 휴대폰으로 게임을 즐기신단다. 인사동까지 가는 길지 않은 시간에 한 생을 풀어냈다. 모진 시간을 잘 건너와 푸근하게 살고 계신 모습에 감탄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앉은 얼굴과 손의 주름이 곱다. 시간이 준 훈장이다. 89세에 친구를 만나러 다니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인사동 모임은 오래된 문우들과 정기모임이다. 받아온 간식 봉지를 푸니 사탕, 젤리, 깨강정, 초콜릿… 정성이 가득했다. 잠깐 마음까지 달콤해졌다. 글을 쓰는 일은 나를 깊이 바라보며 마음을 닦는 일이다. 생산성 없는 글보다 바로 기쁨을 주는 그 분의 행위가 더 높은 격이 아닐까. 우리가 맞이할 수도 있는 89세의 처신에 대해서도 한참 이야기했다. 처음 만난 분에게 본받을 게 많다. 친구는 물론 모르는 사람에게도 소소한 선물 나누기, 함께 사는 가족 배려하기. 다 아는 일이지만 실행하는 건 쉽지 않다.

나는 지금 적당히 늙어서 좋다. 노인은 비슷하게 늙은 사람이 편안한 법이다. 나를 옆자리에 앉힌 건 내가 노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덜 늙어서인지 저렇게 손톱을 가꿀 시간은 없다. 언젠가 심심해지면 손톱에 그림을 그리리라.

몸에 비해 유난히 크고 마디가 굵은 내 손을 바라본다. 손 쓸 일 없는 늦둥이 고명딸로 자라서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살았다. 눈치 볼 줄 모르니 겁도 없었던 듯, 무엇이건 뚝딱 해내던 대견한 손이다. 손톱이 반짝이지 않아도 하얀 반달이 수줍게 숨어있다. 실반지 하나 없는 내 손, 헐렁한 살가죽이 잡히는 내 손, 손등에 굵은 힘줄이 드러나면 손을 들고 어루만진다. 모양새보다 손이 해낸 일에 스스로 높은 점수를 준다.

89세는 어머니가 요양원에서 누워만 계시던 나이다. 어머니는 깔끔하고 부지런한 성격 때문에 손 마를 날이 없었다. 여든이 넘어서 일을 놓으시니 두툼하던 손이 그제야 고와지셨다. 요양원에 가서 뵐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자주 오지 마라. 차 막히기 전에 어서 가라”였다. 몸은 움직이지 못해도 정신은 맑으셨다.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89세, 아버님은 담배를 피우시던 나이다. 오토바이 사고를 여러 번 치르고 자전거를 타던 때다. 아버님은 그 고개를 여유롭게 넘고 한참 지나서 떠나셨다.

89세, 친정아버지와 친정엄마가 맞이하지 못한 나이다.

나이 순서는 아니지만, 양가 부모님이 모두 떠나셨다. 영영 이별할 적당한 시간은 각자의 몸과 정신 상태에 따라 다르다. 삶이 길어지면서 질이 떨어지는 건 축복이 아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일 때까지가 내 삶이다. 건강한 정신이 먼저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이제는 건강한 몸이 우선이다. ‘최후의 무기, 최고의 무기가 내 몸’이란 것을 절절히 느낀다.

89세, 내게도 올까.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없다면 단연코 사양한다. 오늘도 이런 시건방을 부리며 스스로 세뇌한다.

 

<수필 오디세이> 2024 겨울호 (통권 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