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143

이런 모독 / 노정숙

이런 모독 노정숙 올해가 박완서 작가 타계 10주년이다. 그가 1996년에 티베트와 네팔을 다녀와서 쓴 책을 다시 읽었다. 첫 장에 ‘98.11.6 盧貞淑’이라고 쓰여 있다. 그때는 새 책을 사면 이런 표시를 했다. 지금은 가능하면 흔적 없이 본다. 밑줄 치고 싶은 부분엔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필사한다. 깨끗하게 보고 읽을 만한 사람에게 준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나는 티베트, 네팔을 가보지 못해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었다. 한참 후 딸의 결혼식 날짜를 받아놓고 딸과 함께 인도를 거쳐 네팔을 다녀왔다. 살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 분명 이 여행의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며, 이것도 혼수라고 생색을 냈다. 인도를 거쳐서 당도한 네팔의 첫인상은 참으로 순박하다고 생각했는데, 박완서 선생이 티베..

<문학의오늘> 시 2편

지진 노정숙 밴프 국립공원에 사는 곰은 겨울잠을 자기 전에 나무 위에 올라 제 몸을 떨어뜨린다 쿵, 쿵, 쿵, 쿵 제 몸에 쌓인 지방층을 확인해야 겨울을 나는 회색곰 손자가 온 날 아래층에서 초인종을 누른다 삽시에 지진의 근원지가 되었다 제 몸에 쌓인 에너지를 발산해야 하루를 사는 아이들 우리집 위층에 사는 회색곰은 무얼 위해 제 몸을 떨어뜨리나 낮밤 없이 계절도 없이 지진이 나도록 쿵쿵쿵 가슴 노정숙 봉긋 솟아오른 봉오리 젖 대신 실리콘을 담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어여쁜 용기 젖통을 과감히 포기해버린 저 황홀한 결단 걱정과 희망을 버무려 꾹꾹 눌러 담은 젖밖에 없어 젖을 다 내주고 늘어진 쭉정이 덴가슴으로 사는 이 황홀한 견딤 어쨌거나 모든 가슴은 위대하다 2021 여름호 통권39

그 후, 15년

그 후, 15년 노정숙 노인의 ‘어서 죽어야지’ 하는 말이 3대 거짓말 중에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쪽으로 더 기운다. 몸의 쇠락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인데 노인이라고 마냥 살고 싶겠는가. 아직은 몸보다 마음이 부대낄 때가 많다. 조심성 많아진 몸의 신호를 무지르며 여전히 꿈꾸는 가슴이 난감하다. 가끔 먹통이 되어버리는 관계에 기운이 빠진다. 그러면 나는 매일 먹어야 한다는 혈압약을 띄엄띄엄 먹다가 한참 먹지 않는다. 고혈압은 가족력이다. 아버지와 큰오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그래도 난 강단 있는 엄마 체질을 닮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수년 전부터 처방을 받고 있다. 며칠 안 먹으면 얼굴이 붓는데, 더 오래 버티면 그런대로 몸이 적응을 하는지 아무 증상이 없다. 홀로..

어느 날 무심히 / 노정숙

어느 날 무심히 노정숙 화원에서 남천을 데려왔다. 대나무풍으로 미끈한 일곱 가닥 줄기에 적당히 뻗은 이파리가 날렵하다. 동양화를 보는 듯, 한가로워 자주 눈길을 주었는데, 우리집에 온 후로 새로 난 잎이 넙데데하게 자란다. 크지 않은 분재 화분에서 마디게 자라는 성질을 잊어버린 듯하다. 튼실하게 자란 새잎이 원래 있던 잎과 부조화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 뻗는다고 마구잡이로 자라도 자르거나 휠 줄 모르는 주인이란 걸 알았나 보다. 그 화분에는 빨간 버섯도 살다 가고, 화분 위로 살짝 나온 뿌리에 비로드 같은 이끼도 자란다. 어른 허리께 넘는 남천은 줄줄이 피는 하얀 꽃도 건너뛰고, 가을이 깊었는데도 단풍 들 기미도 없이 푸른 새순들만 올라온다. 움트는 연록 잎은 어린 새가 먹이를 향해 부리를 벌리는 모양..

시간의 힘 / 노정숙

시간의 힘 노정숙 시간의 바람 앞에 흔들리던 촛불이 꺼졌다. 아버님께서 요양원 생활이 1년도 안 되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중환자실을 몇 번 드나들었지만 그때마다 바로 회복하셨고, 그날도 아침식사를 조금 하셨다는데… 불효막심이다. 80세 넘도록 오토바이를 타신 아버님은 모든 것을 말로 전하면 즉시 이루어졌다. 말년에는 청력이 떨어져 글로 전하기도 했지만, 어떤 일에도 당신이 우선인 모습으로 94년의 생을 마치셨다. 근엄했던 삶에 비해 죽음의 의식은 간결하고도 순조로웠다. 한줌 재가 되는 과정도 디지털 화면의 숫자가 조용히 알려줬다. 아버님을 모시고 간 첫 번째 병원 응급실에서 하시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사후에 대한 당부 말씀이었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 녹음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띠, 띠, 띠’ 의료기구..

나를 받아주세요 / 노정숙

나를 받아주세요 노정숙 elisa8099@hanmail.net 나 삼문 벼랑에 섰습니다. 내가 먼 곳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 중에는 왜 하필 바쁜 시간에 부고訃告냐며 투덜대는 이도 있을 테고, 잠시 추억을 더듬으며 가슴이 저릴 사람도 어쩌다 있겠지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철든 후 내 생은 눈치보기의 연속이었지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림없는 일이지요. 내가 떠나는 자리를 찾은 벗에게 두 번의 절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슬쩍 웃고 있을 내 영정사진을 보며 혀를 차는 대신 함께 씨익 웃어주길 바랍니다. 축제 같은 이별식이면 더 좋겠습니다. 잔잔하게 읊조리는 연도나 성가가..

의문과 확신 사이 / 노정숙

의문과 확신 사이 노정숙 인간이 죽음을 마무리하는 방법은 동물보다 못하다는 걸, 아무리 좋은 소리도 누가 어디서 말하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진다는 걸 말하며 철학자는 묻는다. “무슨 말인지 알죠?” 사랑이 행복이고 이별이 불행이라는 공식이 개소리라는 걸, 짝사랑은 스토킹이고 미저리라는 걸, 사랑이 구속이고 이별이 자유일 수 있다는 걸 알려주면서 자꾸 묻는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죠?” 거대한 뿌리는 진창에서 뿌리를 내려야 가지를 뻗을 수 있다는 걸, 꽃은 지는 걸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말로 한 고통은 고통이 아닌 걸, 글로 쓴 고통도 이미 고통이 아니라는 걸 말하며 또 확인한다. “무슨 소린지 아시겠죠?” 그럼 알다마다. 확신에 찬 철학자의 돌직구 ‘죽는다’를 ‘디진다’고 말해도, 다 안다. 돌아..

신풍속도 / 노정숙

신풍속도 노정숙 조카가 우리 부부를 집으로 초대했다. 제 형과 사촌 부부도 함께. 고모라고 해야 10년 남짓 차이나니 조카들 모임에 끼워준 거다. 뷔페음식으로 준비한 상차림은 산뜻하고 푸짐했다. 손님을 초대하면서 노동을 최소화한다. 집들이를 해도 식사는 식당에서 하고 다과만 집에서 하는 게 다반사다. 이건 오래된 신풍속이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음식점과 카페로 돌던 모임을 집에서 한다. 자발적으로 하지 못했던 소박한 삶으로 회귀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명절에나 만나게 되는 시어른도 부담스러운 세상에 조카와 조카며느리들도 나이가 드는 걸까. 휴식이 필요하다나, 그 휴식의 자리에 불러준 걸 보면 나는 시어른이 아닌 거다. 만만한 고모인 게 좋다. 앞으로 분기별로 돌아가며 집에서 모이..

이별의 무게 / 노정숙

이별의 무게 노정숙 비오는 일요일 저녁, 한 사람을 생각하며 탄천을 걸었다. 내일이면 그의 육신은 한줌 재가 된다. 육신이 있을 때 마지막까지 열려있는 감각이 청각이기에 망자 곁에서 나쁜 말을 삼가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의 입은 여러 방향에서 나팔을 불고 있다. 대책 없는 언어 테러다. 실상 죽음을 담보해서 얻을 것은 하나도 없다. 죽음 후에도 선업은 회자되고 죽음으로서 악행이 묻힐 수 없고 문제는 계속된다. 그동안 참담하고 황망한 죽음을 많이 보았다. 세상에 나서 꽃봉오리를 터트리지도 못하고 져버린 꽃들, 한순간에 꺾인 곧고 우람한 나무들, 울울창창한 숲이 통째로 타버리기도 했다. 저마다 귀하게 숨탄것들이 제 몫의 쓰임을 다하지 못하고 스러질 때 참으로 애통했다. 사람의 이름이 고유명사가 되면 그 사람..

반갑다, 은수야 / 노정숙

반갑다, 은수야 노정숙 세계 일주를 하고 온 마을버스 은수를 만났다. 오래전부터 50대가 되면 여행가의 길을 걷는 게 소원이던 임택 씨는 꿈을 이루기 위해 경제생활에 전념하면서 체력을 키우고, 영어를 준비했다. 평창동 언덕길을 헐떡이며 올라오는 마을버스, 좁고 가파른 길을 다니며 사람들을 큰길까지 데려다 준 다음 산동네로 되돌아오는 기껏 해야 2차선 도로를 달리는 종로12 마을버스의 인생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은수교통’ 출신인 그에게 ‘은수’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넓은 세상으로 함께 나가기로 작정했다. 677일 동안 48개국을 다녀온 대견한 은수가 지금은 국내 오지를 다니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잠시 쉬다가 21차로 삼척 일대를 향한다. 《마을버스, 세계를 가다》라는 책으로 먼저 만나서인지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