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157

나, 이민진 / 노정숙

나, 이민진 노정숙 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갔다.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후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변호사로 일하다가 건강 문제로 그만두고, 오랜 꿈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필을 써서 출간하고, 대학 3, 4학년 때 논픽션과 픽션 창작 분야에서 일등상을 수상했기에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곧장 소설을 출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다행히 뉴욕에서는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위대한 작가를 연구할 수 있는 풍요로운 문화가 있다. 크고 작은 작가 워크숍과 문화센터, 스와니 문예창작 컨퍼런스 등에 다녔다. 몇 달 뒤 뉴욕예술재단지원금을 받았다. 픽션 부분에서 받은 상금을 내 문예창작 수업에 투자했다. 배..

침대 놀이 / 노정숙

침대 놀이 노정숙 ​ 문우들과 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걸었다. 들길과 산길이 적당히 어우러졌다. 나뭇잎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잘 늙은 나무둥치에 기대어 깊은 숨을 쉰다. 팔랑대는 나뭇잎들은 제 얘기에 바쁘고 팔 벌린 나뭇가지는 새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지리산의 별들을 총총 가슴에 쓸어 담고 입을 벌리면 퐁퐁 별빛으로 빛나는 낱말이 쏟아져 나오는 꿈을 꾼다. 마지막 날 마당에서 바비큐로 저녁을 먹고 난 후, 방에 모여앉아 속을 풀었다. 왜 그들은 나를 슬프게 하는가. 왜 그 사람은 내 맘을 몰라주는가. 왜 영감靈感님은 나를 찾아주지 않나. 글로 뭉치지 못한 말들을 공중에 난사했다. 눈물이 비치기도 하고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하나둘 몽롱해질 무렵, 나는 하늘길펜션 욕실에서 순식간에 넘어지면..

92 퍼센트 / 노정숙

92 퍼센트 노정숙 요즘, 사람들의 말이 잘 안 들어온다. 귀에 이상이 생긴 것인가 해서 이비인후과에 갔다. 귀지가 막고 있는 것은 아니라며 청력검사를 해보자 했다. 방음부스가 설치된 검사실에서 헤드폰을 쓰고 소리가 들리면 버튼을 누른다. 몇 개의 헤드폰으로 바꿔 써 가면서 검사를 했다. 가늘고 긴 음, 투박하고 강한 음이 들릴 때마다 나는 버튼을 눌렀다. 90~100%가 정상범위인데 나는 92%라고 한다. 수치로는 정상에 속하는데 왜 놓치는 말이 많아졌는지. 어음청력검사는 일상의 의사소통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청력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한 번에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아졌다. 내가 듣지 못한 말은 내게 필요하지 않는 말이라고 억지 마음을 먹는다. 이 여우의 신포도 비유는..

수직 상승의 꿈 / 노정숙

특집 :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스승 수직 상승의 꿈 노정숙 어디서 나왔는지 하늘거리는 꽃 사진 아래 쓰인 글에 눈길이 멈췄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늘 불가능해 보인다.’ 활자중독이 맞긴 하다. 침침해진 눈으로도 무엇이건 읽어내려고 애를 쓴다. 사실 내게 가능, 불가능이란 의미가 없다. 좋으면 계속하고 안 좋으면 언제든 그만두면 되는 것이다. 밥벌이가 아닌 일은 자유롭다. 책이 좋아 시작한 글놀이는 소설로 시작했다. 짧게 만나 깊이 알지 못했지만 소설을 합평할 때 맹렬한 분위기에 나는 주눅이 들었다. 집 가까운 곳에서 수필을 만났다. 친근하고 편했는데 수필의 대가이신 운정 선생님은 자꾸 ‘시 같은 수필’을 쓰라고 하신다. 그때부터 시와 수필에 양다리를 걸쳤다. 해독이 필요한 시는 높은 곳에 멀리 있..

제트스키와 백령도

제트스키와 백령도 노정숙 ​ 백령도에서 나오는 날은 바람이 제법 불었다. 전날 유람선 타는 일정이 취소된 걸 보면 제 시간에 떠날 수 있는 것도 다행이다. 2층 맨 앞자리에 앉아서 밀려오는 파도를 즐기는데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요동칠 때마다 비명을 지른다. 앞으로 오라고 했다. 조심조심 앞자리로 나와 앉아 오는 파도를 바라보면서부터 조용해졌다. 멀미로 화장실을 드나드는 사람도 있다. 좀 전에 먹은 아이스크림 탓인지 나도 속이 울렁거려서 앞자리를 포기하고 맨 뒤로 갔다. 뒷자리는 요동이 훨씬 약하다. 처음 간 백령도는 관광지가 아니었다. 섬이지만 어업이 아닌 70% 논농사가 주업이며, 대표음식도 해산물이 아닌 메밀냉면과 메밀칼국수다. 군인이 주민보다 많다. 서울보다 평양이 가까운 서쪽의 땅 끝, 우리 땅을..

고전적 정수기 / 침묵 - 노정숙

고전적 정수기 노정숙 모던한 아파트 주방 안쪽에 둥글넙적한 물항아리가 턱 앉아계신다 아침이면 환하게 엘이디 등불을 물 위에 띄우신다 어미는 고개 숙여 물 한바가지 퍼올린다 저 지극하게 굽은 어미의 등, 모든 어미는 머리 조아리기 선수다 쉿! 조왕신이 기침하신다 침묵 노정숙 반복하는 묵음 연주, 존 케이지의 에 빠졌다. 고요 속에서 내 숨소리와 한숨소리 모든 숨 붙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격렬한 음을 느낀다. 몸 안 톱니바퀴는 곳곳이 헐거워져 느리게 돌아간다. 나는 나사를 조이려 조바심치지 않는다. 낡아서야 벙그는 묵음의 세계, 위로의 손길이 스민다. 2022년 여름호. 통권 40호

성녀와 친구 / 노정숙

성녀와 친구 노정숙 지난주에 친구 자임에게 《아벨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과 온열 양말을 선물 받았다. 솔직히 이런 책은 부담이 간다. 단정한 자세로 읽어야 할 것 같고, 분명 부실한 내 기도생활을 자책하게 될 것이다. 500년 전에 살다간 성녀 데레사가 하느님을 만나며 느낀 환시와 신비를 기록했다. 19세에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고 병고와 회의, 고통을 겪으면서 서서히 기도와 관상의 힘을 깨닫게 된다. 교회로부터 기도 신학의 탁월한 권위자로 인정받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학자가 되었다. 어떤 일을 할 때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실행에 옮기라고 권하는 것은 순정한 믿음에서 나온다고 한다. 아무런 공로도 없이 강력한 은총을 믿는 것 또한 은총이다. 스스로 아무 선행도 한 일이 없고 가난하다는 것을 ..

5천 원과 5만 원 / 노정숙

5천 원과 5만 원 노정숙 조*자 님이 문우 셋과 만났다.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자꾸 두리번거린다. 홀 서빙을 하고 있는 한 청년을 부른다. 다정한 말씨로 “내가 지금 이곳 사람들을 살펴보니 자네가 참 열심히 일을 하네. 자네는 앞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걸세.” 대강 이런 말을 하며 신권 5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넨다. 청년은 꾸벅 인사를 한다. 모르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항상 5천 원짜리 신권을 얼마간 준비해서 다닌다. 전에는 운전을 했고, 한동안은 기사를 대동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외출이 잦지 않으니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70대 그의 배낭 안에는 늘 선물이 가득하다. 특별한 떡이나 참기름, 양말 등 만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을 넣고 나온다. 팬데믹이 있기 전, 문학행사에도 그냥 가는..

짧은 수다 / 노정숙

짧은 수다 노정숙 생텍쥐페리는 감탄을 잘하는 행복한 아이였대요. 인생의 역경이 그를 지각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항공로가 그를 작가로 만들고, 유배가 그를 성자로 만들었대요. 영웅 이상으로, 작가 이상으로, 그의 착한 마음이 가까이 다가왔어요. 착한 마음이 늘 꿈꾸게 하고 희망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좋아하잖아요. 전쟁보다 더 두려운 것은 마음에 희망을 잃는 것이지요. 폐허가 된 촌락, 이산가족, 죽음…. 이런 것들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공동체 정신의 파괴라고 알려주었어요. 감탄을 잘하는 생텍쥐페리는 우리를 무시로 경이로운 세계로 데려다주지요.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면 ‘불운’이 무엇인가 느껴져요.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비평가의 말이 아니라 자연의 말이라는 것으로 비평가들에게 반감을 샀지요. 시대를..

노천탕에서 / 노정숙

노천탕에서 노정숙 마을버스 은수랑 두 번째 여행 중에 학가산 온천을 들렀다. 안동시에서 만들었다는데 깔끔하고 쾌적하다. 샤워를 하고 노천탕으로 갔다. 넓은 탕에는 두 어르신이 앉아 있다. 서로 어디에 사느냐며 수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 다 안동의 종손며느리로 연륜이 곱게 내려앉았다. 한 분이 손을 내밀며 화려한 네일아트를 자랑하신다. 딸이 생일선물로 해줬는데 앞으로 계속 해야겠다고 하신다. 고우시다고 한껏 칭찬을 해드렸다. 곁에 계신 갸름한 얼굴의 친구 분은 예쁜 건 다 지나갔고, 아픈 곳이나 없으면 좋겠다고 한다. 1900년생 미국의 초상화가 엘리스 닐은 80세에 옷 벗은 자화상을 그렸다. 파란색 줄무늬 의자에 앉아 흰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손에는 붓과 흰 천을 들고 있다. 평론가들은 흰 천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