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성녀와 친구 / 노정숙

칠부능선 2022. 4. 1. 19:25

 

성녀와 친구

노정숙

 

 

지난주에 친구 자임에게 아벨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과 온열 양말을 선물 받았다. 솔직히 이런 책은 부담이 간다. 단정한 자세로 읽어야 할 것 같고, 분명 부실한 내 기도생활을 자책하게 될 것이다.

500년 전에 살다간 성녀 데레사가 하느님을 만나며 느낀 환시와 신비를 기록했다. 19세에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고 병고와 회의, 고통을 겪으면서 서서히 기도와 관상의 힘을 깨닫게 된다. 교회로부터 기도 신학의 탁월한 권위자로 인정받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학자가 되었다.

어떤 일을 할 때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실행에 옮기라고 권하는 것은 순정한 믿음에서 나온다고 한다. 아무런 공로도 없이 강력한 은총을 믿는 것 또한 은총이다. 스스로 아무 선행도 한 일이 없고 가난하다는 것을 늘 기억한다면, 더욱 진보하며 진정한 겸손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 겸손의 덕을 이리 높이 보다니100쪽이 넘으면서 확 끌어당긴다.

다른 사람 안에서 덕과 좋은 자질을 발견하도록 노력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을 하나도 볼 수 없게 되도록 애쓰라고 한다. 그리고 기억을 노예라고 말한다. 기억은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기능을 끌어당길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른 기능이 기억을 따라오게 만든다. 거룩한 촛불에 기억을 타 버리도록 하면 초자연 상태에 머물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쉼을 쉼이라 하고 명예로운 것을 명예로 여기며 즐거운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나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미사에 참여했으나,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모릅니다. 나는 황홀경이 아주 잠시 동안만 계속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계가 울렸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그 황홀경과 영광 속에서 두 시간이나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아니면 내가 아무리 그것을 얻고자 노력한다 해도, 그것을 얻으려고 몸이 가루가 되도록 애쓴다 해도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는 이 불의 불티 하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472쪽)

 

성녀의 자서전을 읽는 내내 1년 전에 하늘나라로 이사한 친구를 떠올렸다. 수녀는 아니지만 수녀같이 살다 간 친구, 그녀에게도 이런 고뇌와 회의와 황홀이 오갔으리라 생각하며 마음이 먹먹해졌다.

1때 내 짝꿍 김미숙 미카엘라, 공무원 생활을 하다 명퇴를 하고 본격적으로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자신도 지병이 있으면서 더 아픈 사람들 손을 잡아주었다. 느릿한 몸짓에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친구는 사후 모든 장기를 기증했으나 마지막에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건 두 눈이었다. 맑고 선한 눈이 세상 어딘가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며칠 전, 미숙이 동생에게 톡이 왔다. 동생의 꿈에 나타나서 그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세상을 떠나보니 여기도 좋은 세상이라고, 그러니 이제 날 생각하며 슬퍼하지 마라며 위로 했다고 한다. 그럼, 그렇겠지. 그곳에서는 주위 사람들 돌보는 거 조금만 하고 그냥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덕분에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생명나눔 추모관에 미카엘라의 사진이 있다는 걸 알려왔다. 예의 그 선한 미소를 만났다. ‘미개봉 반납이라는 묘비가 어울릴 것이라며 그녀의 순결을 생각하던 게 떠올라 미안하다. 한 가정이 아닌, 더 깊고 넓은 사랑에 관여한 생은 오히려 열렬했던 거다. 이타적 마음과 행동을 끌어내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사람도 많다. 어떤 삶에 가치를 두는가를 자유의지에 맡기셨기에 우리는 선하거나 악하게, 지혜롭거나 무지하게 뒤엉켜 산다. 선한 마음을 열고 행동하지 못한 사람도 미개봉 반납이다.

친구가 못한 이야기를 성녀 데레사의 삶을 바라보며 감히 헤아려 본다.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영광을 쌓는 게 수도자들의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현세의 즐거움을 유보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다. 온전히 믿는 자는 땅에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쁘고 즐거웠을 것 같다.

사이트에 추모글을 쓰고 온라인으로 나도 장기 모두를 기증 등록했다. 옆에 있던 남편이 자기도 등록해 달라고 한다. 어쩌면 나보다 더 쓸 게 있을 수도 있다나. 줄이긴 했지만 여전히 술과 담배를 즐기면서 하는 말이 뻔뻔하지만 순순히 해줬다. 장기기증 신청은 가족의 동의도 필요 없고 간단하다.

신청한 지 사흘 만에 희망등록 카드가 왔다. 거저 받은 몸을 다 쓴 후에도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시신기증도 오래 전 가톨릭대학 병원에서 자원봉사하면서 친구가 알려줬다. 30여 년 전부터도 그녀는 병원 봉사를 하고 있었던 거다. 공무원의 박봉과 퇴직 후 연금생활자로 넉넉지 않은 형편을 알면서도, 나는 친구의 나눔 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게 걸린다. 그때는 되레 노후 대책은 않고 실없는 일을 한다며 걱정까지 했다. 간혹 염려를 들으면 친구는 그저 쓱 웃고 만다. 돌아보니 말수가 적었던 그녀는 하느님과의 소통으로 마음이 넉넉했던 거다. 얄팍한 내 계산이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땅의 일에 마음을 두고 산다. 그나마 다행인 건 먼저 간 미숙이뿐만 아니라 보시기 좋게 사는 지인과 친구들이 곁에 있어 든든하다. 게으른 내 행실은 냉담에 가깝지만 기도의 힘을 믿는다.

자임에게 받은 온열 양말은 신는 즉시 발을 따뜻하게 해 주고, 성녀 데레사의 일생은 더디지만 마음에 온기를 일깨워준다. 그럼에도 내가 올리는 화살기도는 그냥 감사만 하는 싱거운 기도다.

 

<인간과문학> 2022 봄호 (통권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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