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전편의 마지막 장면 / 안병태

칠부능선 2023. 3. 23. 12:58

 

 

전편의 마지막 장면

안병태

 

 

내가 뭐 별말이야 했다고?

한창 잔소리에 몰입해 있다가도 손님이 방문하거나 전화벨이 울리면 목소리를 번개같이 두 옥타브나 떨어뜨리고 소프트 톤으로 나긋나긋, 사뭇 딴 사람으로 돌변하기에,

사람 목소리가 어쩌면 저토록 순식간에 변할 수 있을까!?”

새삼스럽게 경이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비아냥거린 죄밖에 없어. 나는 탤런트와 동거하는 게 아닌지 가끔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니까?

뿐이야? 방문객과 나직나직 기품 있게 담화를 나눈 뒤 고샅까지 배웅하고 들어왔거든, 낭창낭창 통화를 끝내고 미소 머금은 표정을 아직 지우지 않았거든 그것으로 상황을 종료해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지 않겠어? 그런데 아까 중단한 잔소리 다음 편에 계속전편의 마지막 장면을 잊어버리지도 않고 다시 두 옥타브 끌어올려 알레그로휘몰이로 계속하는 거야. 읽던 책을 잠시 엎어놓았다 다시 집어 들듯 잔소리를 사뭇 즐긴다니까? 그렇지만 나는 고작 들릴락 말락 혼잣말로 이죽거릴 따름이지.

잔소리가 무슨 연속극이야~ 만화책이야?”

큰소리로 대꾸하면 안 되느냐고? 안 돼! 그 부분이 바로 역린이야. 이글거리는 화로에 숯을 보탬과 같고, 사나운 개의 꼬리를 잡는 것과 같으므로 그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편해. 역린을 건드리면 잔소리 소요시간만 길어질 뿐이야. 나도 이젠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이골이 나서 오히려 나직나직 말하면 혹시 어디 아픈가? 또 무슨 마른천둥을 내리치려고 저러나~ 긴장된다니까?

그러니까 잔소리 재료는 왜 자꾸 생산하여 제공하느냐고? 모르는 말씀! 그의 시각엔 내 삶 전체가 잔소리 원료거든.

장구한 세월 형성된 줄거리에 가끔 새로운 소제를 삽입해가며 순서만 화투장 섞듯 바꿀 따름, 전체 옴니버스 레퍼토리는 변함이 없어. 숫제 레코드판이야. 같은 강의를 반복해 듣는 것처럼 다음 내용이 뭔지 내가 먼저 알고 있을 정도라니까.

계모시어머니 아래 4형제 맏이한테 시집와 뒤란 밤나무 아래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건만 경상도 사내 아니랄까봐 보듬어 달래준 일 한번 없었다는 원망,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 강변의 얼음구멍 앞에 앉아 맨손을 호호 불어가며(두 손 모아 시늉까지 해가며) 손빨래하던 타령, 재래식 부엌에서 삭정이 지펴가며 요리하느라 머리카락 다 볶아먹고 치마에 불이 붙어 분신자살할 뻔한 전설, 재종형이 양계장 동업하자고 꼬드겨 판을 벌였다가 야반도주하는 바람에 대출금 갚느라 황금 같은 신혼 3년을 춥고 배고프게 고생한 넋두리, 그 여파로 남은 닭 재고 정리하느라 매일 닭을 삶아먹어 지금도 닭만 보면 소름이 끼쳐 치킨조차 안 먹는다는 예기, 그 와중에도 내가 연가수당연말정산환급금을 무려 5년간이나 삥땅해먹은 열불(이 대목에 이르면 볼륨이 끝까지 올라가며 치를 떨더군), 애들 학창시절 아침마다 도시락을 6개씩이나 쌌던 얘기, 명절, 제사, 집안 대소사에 맏며느리로서의 부담과 역할에 대한 유세와 공치사. 그중 단연 백미는, 수필가랍시고 한량처럼 나돌아 다니며 어설프게 주워들은 알량한 잡문으로 일껏 마누라 흉이나 전국 방방곡곡에 퍼뜨린다는 대목과, 남들은 공모전에서 상금을 700만원씩이나 타다 주더라만, 원고를 아끼지 않고 아무데서나 청탁 들어온다고 덥석 덥석 집어줘 평생 상금은 고사하고 원고료 한 닢 구경시키는 법이 없다는 대목이야. 나도 상금을 타서 예쁘고 아담한 노트북을 하나 장만해 옆에 끼고 다녔으면 싶지만 공모전 작품을 비축하기커녕 당장 원고청탁에 응하기도 바쁜 형편이요, 원고료만 해도 염치없습니다~’ 하고 책이나 두어 권 보내오고 마는 걸 난들 어쩌란 말이야? 좌우간 45년 전 족두리 얹혔던 정수리에 파뿌리를 뒤집어쓴 지금까지의 회고록 맏며느리뎐문인 마누라의 울분두 마당을 완창하려면 아마 이틀은 걸릴 거야.

한번은 잔머리를 굴려 급한 일이 있는 척 화장실로 대피해 계속 물을 내리며 버텼지. 세상에! 거기까지 따라와 문짝을 노려보며 잔소리를 퍼붓더라니까?

또 한 번은 지루해서 시계를 자꾸 쳐다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하품을 했더니, 남 힘들여 말하는데 왜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고 하품해 김을 빼느냐고 그걸 트집 잡아 또 노발대발하더라니까? 누가 자기보고 힘을 빼랬어? 알다시피 아랫입술이 두텁잖아? 입술이 무거워 입이 저절로 열리나봐. 입이 열리면 음식물이 빨려 들어가거나, 동강 래프팅 폭포처럼 잔소리가 내리 쏟아지는 거지.

몇 년 전 부목사님께 이런 애로사항을 의논드렸더니 말없이 쪽지에 잠언 25:24’라고 써 주시더군. 집에 와 성경책을 찾아보니,

잔소리하는 여인과 대궐에서 함께 사는 것 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무릎을 친 다음 텃밭에 황토방을 지어 서제를 그리로 옮겼지. 진작 여쭈어 볼 걸!

그러나 그도 잠시, 거기까지 쳐들어와 고함을 지르니 조그만 흙집이 들먹들먹 벽돌 모서리가 우수수 부서져 내리고, 방음장치가 안 돼 귀가 먹먹하더군. 저번 경주포항 지진은 지진도 아니야.

다시 부목사님을 찾으니 서슴없이 또 써주시기를, ‘잠언 21: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궁궐에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서있는 것이 나으니라.’

솔로몬 부인들도 잔소리가 심했나봐. 통틀어 여인 하나 조차 이리 버겁거든 후궁이 천여 명이었다니 오죽하랴. 솔로몬은 그렇다 쳐도 부목사님은 또 이 방면에 왜 그리 밝으신 거야? 혹시 사모님도?

오늘도 광야에서 홀로 헤매다가 무열왕릉 고갯마루를 바라보니 아직 해가 두어 뼘이나 남았어. 지금 들어가 봤자 김치 먹을 거야 말 거야? 배추밭의 벌레나 잡으라는 잔소리밖에 더 듣겠어? 출가한 김에 새로 단장했다는 천마총이나 점검하고 들어갈까 하여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어떤 여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위험하오니 뒤로 물러나주세요! 위험하오니 뒤로 물러나주세요! 위험하오니

외치는 거야. 내가 센서를 건드렸나? 광야로 나오니 이번에는 기계속의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 잔소리를 퍼붓더군. 들어가도 잔소리, 나와 봐도 잔소리, 진실로 나는 잔소리를 듣기 위해 태어났나봐.

소크라테스, 모차르트, 톨스토이는 쿠산티페, 콘스탄제, 소피아 덕분에 성공한 분들이지요. 아마 수필가로 대성하실 겁니다. 그래도 인내심의 한계가 오거든 이걸 참고하세요.”

담임목사로 영전해 가시며 아예 미리 쥐어준 쪽지. ‘잠언 27:15’

여인의 잔소리는 비 오는 날에 연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손으로 기름을 움켜쥐는 것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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