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96

슬기로운 험담생활 / 최민자

슬기로운 험담생활 최민자 ​ ​ 투표장에 다녀왔다. 맘에 드는 후보도 정당도 없지만 한표의 권리는 행사해야겠기에. 이번 선거 역시 정책경쟁이나 공약검증 대신 상대방을 흠집내기 위한 온갖 네거티브 프레임과 흑색선전 같은 것들로 진영간 대결 양상으로 치달아버린 느낌이다. 남은 재임기간이래봤자 1년 2개월도 안 되니 정책이나 공약이 별 의미도 없겠지만 A후보나 당이 좋아서 찍는게 아니라 B후보나 그 당이 싫어서 다른편에 표를 주는, 나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또는 모르는 사람들이 마음의 벽을 허무는데는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과 일치시키는 일보다 그가 싫어하는 것과 내가 싫어하는 것의 공통점을 찾는게 결속력이 훨씬 강하다고 한다. 특히나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 ..

산문 - 필사 + 2021.04.24

라다크 체험기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라다크 체험기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드물게 있는 나무들 - 살구나무, 버드나무, 포플러 - 은 혹심한 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땔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나무들은 조심스럽게 보살펴지고, 그 목재는 건축이나 악기, 도구들을 위해서만 사용된다. 땔감으로는 짐승의 마른 똥이 이용되고 인분은 거름으로 이용된다. 집집마다 퇴비 변소가 있고 모든 쓰레기는 재순환된다. 라다크에 도착한 직후 나는 어느 냇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막 더러운 옷을 물 속에 던져 넣으려 할 때 일곱 살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소녀는 부끄러움을 타면서 "거기서 옷을 빨면 안 돼요. 아랫마을에서 그 물을 마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소녀는 적어도 일 마일이나 아래로 떨어져 있는 한 마을을 가리켰다. ..

산문 - 필사 + 2021.03.09

마음의 감옥 / 이산하

마음의 감옥 이산하 "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분온시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도 있었습니다.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 - '제주 4•3 70주년' 문재인 대통령 추념사 중에서 2018년 봄 '제주 4•3 70주년 추념식' 에서 사회자인 이효리 가수가 라는 내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곧 문재인 대통령의 입에서 "이산화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이란 말까지 나왔다. 혼자 TV를 보고 있던 나는 이 모든 게 환청처럼 들리면서 그 순간 현기증이 일어났다. 잠시 후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산하라는 이름이 30년 만에 유배가 풀렸구나…' 일국의 대통령이 사석도 아닌 공식석상에서 호명한 일이니 충분히..

산문 - 필사 + 2021.01.15

밤 / 이태준

밤 이태준 동경서 조선 올 때면 늘 밤을 새삼스럽게 느끼곤 하였다. 저기도 주야가 있지만 전등 없는 정거장을 지나보지 못하다가 부산을 떠나서부터는 가끔 불시 정차 같은 캄캄한 곳에 차가 서기 때문이다. 무슨 고장인가 하고 내다보면 박쥐처럼 오락가락하는 역원들이 있고 한참 둘러보면 어느 끝에고 깜박깜박하는 남폿불도 보인다. 밤, 어둠의 밤 그대로구나! 하고 밤의 시간이 아니라 밤의 실물을 느끼곤 하였다. 그리고 정말 고향에 돌아오는 것 같은 아늑함을 그 잠잠한 어두운 마을 속에서 품이 벌게 받는 듯하였다. "아이 정거장이 쓸쓸하긴 하이. " 하고 서글퍼하는 손님도 있지만 불 밝은 도시에서 지냈고 불투성이 정거장만 지나오면서 시달릴 대로 시달린 내 신경에는 그렇게 캄캄한 정거장에 머물러주는 것이 도리어 고마..

산문 - 필사 + 2021.01.07

벽 / 이태준

벽 이태준 뉘 집에 가든지 좋은 벽면壁面을 가진 방처럼 탐나는 것은 없다.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 속처럼 고요한 벽면,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이나 한 폭 걸어놓고 혼자 바라보고 앉았는 맛,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둡는 줄 모르는 맛, 그리고 가끔 다른 그림으로 갈아 걸어보는 맛,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 어제 K군의 입원으로 S병원으로 가보았다. 새로 지은 병실, 이등실, 세 침대가 서로 좁지 않게 주르르 놓여 있고 앞에는 넓다란 벽면이 멀찌가니 떠 있었다. 간접광선인 데다 크림빛을 칠해 한없이 부드럽고 은은한 벽이었다. 우리는 모두 좋은 벽이라 하였다. 그리고 아까운 벽이라 하였다. 그렇게 훌륭한 벽면에는 파리 하..

산문 - 필사 + 2021.01.07

가을 바람소리 / 김훈

가을 바람소리 김훈 가을에는 바람의 소리가 구석구석 들린다. 귀가 밝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이 밝아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숲을 흔들때, 소리를 내고 있는 쪽이 바람인지 숲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이런 분별은 대체로 무가치하다. 그것을 굳이 분별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은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를 바람소리라고 한다. 바람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다. 맑은 가을날, 소리를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사물들이 바람에 스치어 소리를 낸다. 그 난해한 소리를 해독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있다. 습기가 빠진 바람은 가볍게 바스락거리고 그 마른 바람이 몰려가면서 세상을 스치는 소리는 투명하다. 태풍이 몰고 오는 여름의 바람은 강과 산맥을 휩쓸고 가지만, 그 압도적인 바람은 세상의 깊이를 드..

산문 - 필사 + 2020.12.29

춘원春園 / 피천득

춘원春園 피천득 나는 과거에 도산 선생을 위시하여 학덕이 높은 스승을 모실 수 있는 행운을 가졌었다. 그러나 같이 생활한 시간이나 정으로나 춘원과 가장 인연이 깊다. 춘원에 대하여는 정말인 것, 거짓말인 것, 충분히 많이 너무 많이 글로 씌어지고 사람 입에 오르내려 왔다. 구태여 무얼 쓰랴마는, 마침 쓸 기회가 주어졌고 또 짧게나마 쓰고 싶은 생각이 난 것이다. 그는 나에게 워즈워스의 로 시작하여 수많은 영시英詩를 가르쳐 주었고, 도연명의 를 읽게 하였고, 나에게 인도주의 사상과 애국심도 불어넣었다. 춘원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다. 그는 남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남을 모략중상은 물론 하지 못하고, 남을 나쁘게 말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남의 좋은 점을 먼저 보며, 그는 남을 칭찬하는 기쁨을 즐기었..

산문 - 필사 + 2019.08.19

그 사이에 / 산도르 마라이

그 사이에 산도르 마라이 그 사이에, 지금까지 살아온 사십 년이란 세월 동안, 다시 말해 ‘사람의 반평생’을 훨씬 넘어설 때까지 무엇을 배웠고, 어떤 경험을 통해 풍성해졌고, 어떤 진실 때문에 괴로워했으며, 어떤 지혜에 의해 견문을 넓혔냐는 물음에 번개처럼 빠르게 대답을 해야 한다면, 나는 서둘러 숨 가쁘게 그러나 힘껏 답변할 것이다. “음료수나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지 말라, 심장에 해롭다.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지 말라. 그러나 피망과 약간의 후추는 즐길 수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좋아하는 음식을 양껏 먹어라. 그러나 고기는 하루에 한 번, 가능하면 점심에 먹어라. 한 가지 요리로 만족하고, 사과 같은 과일이나 야채를 많이 섭취하라. 속을 거북하게 하지 않는 과일이 몸에 좋을 것이다. 레몬수..

산문 - 필사 + 2019.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