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춘원春園 / 피천득

칠부능선 2019. 8. 19. 14:15

 

춘원春園

피천득

 

 

나는 과거에 도산 선생을 위시하여 학덕이 높은 스승을 모실 수 있는 행운을 가졌었다. 그러나 같이 생활한 시간이나 정으로나 춘원과 가장 인연이 깊다. 춘원에 대하여는 정말인 것, 거짓말인 것, 충분히 많이 너무 많이 글로 씌어지고 사람 입에 오르내려 왔다. 구태여 무얼 쓰랴마는, 마침 쓸 기회가 주어졌고 또 짧게나마 쓰고 싶은 생각이 난 것이다.

 그는 나에게 워즈워스의 <수선화>로 시작하여 수많은 영시英詩를 가르쳐 주었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읽게 하였고, 나에게 인도주의 사상과 애국심도 불어넣었다.

춘원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다. 그는 남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남을 모략중상은 물론 하지 못하고, 남을 나쁘게 말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남의 좋은 점을 먼저 보며, 그는 남을 칭찬하는 기쁨을 즐기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가 비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천성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게 여기게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못하고 냉정해야 할 때 냉정하지 못했다. 그는 남과 불화하고는 자기가 괴로워서 못 살았다.

그는 정직하였다. 그를 가리켜 위선자라 말한 사람도 있으나, 그에게는 허위가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였다. 누가 자기를 칭찬하면 대단히 좋아하였다. 소년 시대부터 그 명성은 누구보다도 높았지만, 그는 교태가 없었다. 나는 3년 이상이나 한 집에 살면서도 거만하거나 텃세를 부리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자기 지식이나 재주를 자인하면서도 덕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높은 인격에 비하면 재주라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였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자기 작품은 <가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인공도 '가실'이었다. 그는 글을 수월하게 썼다. 구상하는 시간도 있었겠지만, 신문소설 1회분 쓰는데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일이 드물었다. 써내려간 원고를 고치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 원고는 누구보다도 깨끗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읽기에도그 흐름이 순탄하다.

그 일생은 병의 불연속선이었다. 그러나 그는 낡아 빠지거나 시들지 않았었다. 마음이 평화로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싱싱하고 윤택하고 '오월의 잉어' 같았다. 그를 대하는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이나 어떤 계급 사람이거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다들 한없는 매력을 느꼈다. 그 화제는 무궁부진하고 신선한 흥미가 있었다. 그와 같이 종교, 철학, 문학에 걸쳐 해박한 교양을 가진 분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는 신부나 승려가 될 사람이었다. 동경 유학 시절에 길가 관상쟁이가 그를 보고, 출가할 상이나 눈썹이 탁해서 속세에 산다고 하였다. 그는 욕심이 적은 사람이었다. 30이후로는 중류 이상 생활을 하였으나, 살림살이는 부인이 하였고 자기는 그때 돈으로 매일 2원 용돈이 있으면 만족하였다. 한 번은 내가 어떤 가을 석왕사로 갔더니 춘원이 혼자 와 계셨다. 그때 그에게는 가진 돈이 10전 밖에는 없었다. 거리에 나왔다가 문득 오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산을 좋아하였다. 여생을 산에서 보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안타깝게도 크나큰 과오를 번하였었다. 1937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해서 무엇하리. 그의 인간미, 그의 문학적 업적만을 길이 찬양하기로 하자. 그가 나에게 준 많은 편지들을 나는 잃어버렸다.

지금 기억되는 대목 중에 하나는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할 것이나, 기쁜 일이 있더라도 기뻐할 것이 없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항상 마음이 풍광세월光風歲月 같고 행운유수行雲流水 와 같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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