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가을 바람소리 / 김훈

칠부능선 2020. 12. 29. 15:37

가을 바람소리

김훈

 

 

  가을에는 바람의 소리가 구석구석 들린다. 귀가 밝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이 밝아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숲을 흔들때, 소리를 내고 있는 쪽이 바람인지 숲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이런 분별은 대체로 무가치하다. 그것을 굳이 분별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은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를 바람소리라고 한다. 바람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다. 

 맑은 가을날, 소리를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사물들이 바람에 스치어 소리를 낸다. 그 난해한 소리를 해독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있다. 습기가 빠진 바람은 가볍게 바스락거리고 그 마른 바람이 몰려가면서 세상을 스치는 소리는 투명하다. 태풍이 몰고 오는 여름의 바람은 강과 산맥을 휩쓸고 가지만, 그 압도적인 바람은 세상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가을에는 오리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와 자작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다르다. 오리나무 숲의 바람은 거친 저음으로 폭포처럼 흘러가고 자작나무나 은사시나무 숲의 바람은 잘 정돈된 고음으로 흘러간다. 나뭇잎의 크기와 흐느적거림, 그리고 나뭇가지들이 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름의 바람에 끄달리는 숲은 고통 받는 성자와 같다. 그러나 가을의 바람에 스치는 숲은 바람과 더불어 편안하게 풍화되어가며 운명의 속내를 드러낸다. 메마른 가을의 억새 숲을 스치는 바람의 소리는 하얗게 바래서 자진하는 억새의 풍화를 완성한다. 누렇게 시든 옥수수 밭을 스치는 가을바람 소리는 파도의 소리를 닮아 있다. 풍화란, 세상이 바람 쪽으로 이끌려가면서 닳고 또 무너지고 사위어 가는 모습이다. 이때의 바람은 시간의 본질이다. 가을 억새밭에서 그 풍화는 바람의 소리 위에 실려 있다. 가을에, 물기 빠진 나뭇잎들에는 백골과도 같은 잎맥이 드러난다. 잎맥은 삶의 통로이며 구조이다. 그 통로가 늙은이의 정맥처럼 돌출해서 바람에 스친다.

억새 잎의 마른 잎맥을 스치고 가는 가을바람 소리는 대금의 소리다. 대금을 불 때, 바람은 인간의 몸에서 나오고, 소리는 그 떨판에서 나온다. , 바람을 저장한 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바람을 저장한 몸은 또 다른 바람에 의해 순하게 풍화되어 갈 준비를 마친 몸이다.

가을에 눈은 산맥을 넘어가고 귀는 수평선을 건너간다. 먼 바다를 건너와서 연암 쪽으로 다가오는 바다의 바람은 원양의 미세한 출렁임을 실어 온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들이 가을에는 더욱 확실하고 뚜렷해진다. 그래서 바람이 불어서 먼 것들이 가까이 실려 오는 가을날, 가장 불쌍한 것은 손이다.

 

겨울의 바람은 날카롭고 우뚝하다. 그 바람은 세한도의 화폭 속을 불어가는 바람이다. 겨울의 바람은 마른 나뭇가지들의 숲을 베고, 도시의 빌딩 사이의 좁은 골목을 휘돌고 전깃줄을 울린다. 겨울의 바람은 사람을 낮게 움츠리게 하지만, 가을의 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이 세상과 마주 서게 한다.

가을의 바람은 세상을 스쳐서 소리를 끌어낼 뿐 아니라, 사람의 몸을 스쳐서 몸속에 감추어진 소리를 끌어낸다. 그 소리 또한 바람이다. 몸속의 바람으로 관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호흡은 그래서 가을날 더욱 선명히 느껴진다.

바람 부는 가을날, 모든 잎맥이 바람에 스쳐서 떨릴 때, 나는 내 몸속의 바람을 가을의 바람에 포개며 스스로 풍화를 예비한다. 악기가 없더라도 내 몸이 이미 악기다. 가을에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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