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T 1000과 청개구리 / 조후미

칠부능선 2022. 6. 16. 10:21

T 1000과 청개구리 

조후미

 

 

나는 청개구리다

내가 청개구리임을 미리 밝히는 이유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나 때문에 열 받거나 혈압이 올라 뒷목을 잡을 수도 있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이유에서다

과거의 나는 빨간 불에 멈추고 파란 불에 가며 규정 속도를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 몸속 DNA 저 깊숙한 곳에 저장된 청개구리 유전인자가 오랜 시간 은밀하게 숨어 지내다 최근에야 정체를 드러냈다

 

하라는 일은 하기 싫고 금지된 일은 더 하고 싶어졌다 남의 말은 드럽게 안 듣는 데다 최 씨도 울고 갈 똥고집이 온몸을 친친 감고 도전자들에게 내 고집을 꺾어보라며 치기 어린 강수를 든다 한때는 웰빙이 대세였고 최근에는 욜로와 미니멀 라이프가 여러 매체에서 오르내리지만 아 뭐래 나는 복세편살하련다

이런 속성을 숨기고 십 년 넘게 착한 수필을 쓰려고 존버했다

내가 생각하는 착한 수필은 빼어난() 느낌(feel)으로 쓴 글이다 작가의 올곧은 의식이 생생한 필력으로 구현되는 수필이야말로 울트라 캡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그런 수필을 쓰려고 인싸를 포기한 채 아싸로 살다시피 했다

수필계에 입문했을 당시에는 맞춤법과 문장부호를 지키고 오탈자를 내지 않기 위해 촉수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수필과 조금 더 가까워진 후로는 문학적 표현과 예술성 높은 작품을 구현하고 싶은 욕심에 머리칼을 쥐어뜯다 보니 그 많던 머리숱이 반만 남았다

수필이 궁금해서 잠을 설쳤다

짝사랑은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

수필 쪽으로 한발 내디디면 수필은 한발 물러나서 도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러닝머신 위에서 열라 뛰어도 언제나 제자리인 것처럼 수필은 호락호락하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밤을 꼴딱 새워 쓴 글이 마음에 안 들면 너는 내 새끼가 아니라고 키보드 위에서 검지가 백스페이스 키를 미친 듯이 눌러대고 그래도 마음이 흡족하지 않으면 롬곡옾눞을 흘리며 파일을 통째로 휴지통에 날려버리던 과거의 나여 할많하않

작가가 쉽게 쓴 글은 독자가 읽기 어렵고 작가의 고뇌가 깃든 글은 독자에게 쉽게 읽힌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오늘은 나의 탈모를 막고 청개구리라는 정체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싶기에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 중이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익히고 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던 과거 이력과 몸에 밴 직업정신이 오탈자를 잡아내기는 하지만 문장부호는 무시하련다 문단이나 줄바꾸기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표준어나 미려한 문장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 속어 비속어 은어 신조어 줄임말로 글이 얼룩져도 얼죽아답게 소신을 지키겠다

이 글은 청개구리가 지닌 의식의 흐름 따라 붓 가는 대로 쓴 어처구니없는 기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고 심기가 불편하다면 아재이고 술술 읽힌다면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의 재학생일 것이다

이것도 글이냐며 쓰레기 취급해도 상관없다 본래의 나는 쿠크다스 멘탈에 트리플 A형 인간이지만 청개구리라고 선언하고 나니 근자감이 폭발하는 중이다

케바케지만 이런 생뚱맞은 수필에 흥미를 보이는 독자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본다

사실 국내에는 정도를 걸으며 기품있는 글을 쓰는 훌륭한 수필가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독자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글을 쓰고자 고군분투하는 동료 문인들의 노력을 어떻게 다 활자로 옮기겠는가

그러나 해마다 수천 편의 명수필이 독자를 만나기도 전에 잊혀진다 작가는 그저 읽어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글을 쓸 힘을 얻고 위안을 받는 자들인데 읽히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글을 볼 때 그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나의 지인은 젊은 시절 삶이 고달파서 죽을 준비를 하다가 우연히 읽은 수필 한 편 덕에 다시 살 힘을 얻었다고 했다 마침 글을 쓴 노작가를 뵈러 가는 길이어서 지인의 일화를 전해드렸더니 노작가는 일평생 글을 쓴 이유가 단번에 보상받았다며 기뻐하셨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좋은 글을 써야 할 당위성을 확인받았다 읽어주는 이 없어도 꾸준히 양질의 수필을 쓰다 보면 언젠가 당신의 수필 한 편 덕분에 또는 당신이 쓴 수필의 어느 문장으로 인해 나는 살 힘을 얻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독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착한 수필은 기성작가들이 이미 많이 써 놓았고 또 쓰고 있으며 앞으로도 쓸 것이기에 중2병 걸린 청개구리는 한 번쯤 엇나가는 수필을 써도 된다고 본다

수필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직간접적인 체험과 경험이 소재가 되고 주를 이루기에 독자에게 진솔하게 다가간다

가끔은 사감 선생님처럼 엄근진한 작품들도 만나게 되지만 대부분은 따뜻하고 정감있다

반면에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소재가 되고 교훈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기에 수필은 지루한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 일반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외치고 싶다

이 글에 반감을 가진 독자의 눈에는 모든 글자가 개골개골로 보이겠지만

수필은 고루하지 않다

수필은 개구지고 흥미진진하다

수필은 다채롭고 변화무쌍하다

수필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며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수필은 사유의 힘을 길러주고 미처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거리를 던져주며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게 한다

이 외에도 천만 가지의 이유를 더 댈 수 있지만 나는 낄끼빠빠를 아는 청개구리이므로 더 이상의 나열은 생략한다

수필이 다채롭고 변화무쌍할 수 있는 까닭은 장르와 장르를 넘나들 수 있는 속성 때문이다 마치 터미네이터에 등장하는 액체금속형 로봇 T1000을 닮았다.

영화 속 T1000은 미래에서 갑툭튀한 신박한 로봇이다 단단한 금속의 속성을 지녔지만 액체처럼 흐를 수도 있다 액체가 용기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이 T1000도 환경에 맞게 자유자재로 변형한다 형식의 자유로움이라는 치트키를 쓰며 장르를 융합할 수 있는 수필과 흡사하다 이런 까닭에 나는 감히 수필이야말로 미래형 글쓰기라고 외치고 싶다

이미 수필은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카카오 스토리 밴드와 같은 SNS상에서 제 역할을 다하며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발맞춰가고 있다 하지만 수필을 누구나 쓸 수 있는 쉬운 글쓰기로 격하시키는 일은 자중해야 한다 누구나 피아노를 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아름다운 곡을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와 같은 맥락에서 누구나 수필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작품으로 논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은 아닌데 왜 수필만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라고 폄하하며 하대하는가

이는 작가들만의 몫은 아니다 작가들이 무수히 수필에 실험을 가해온 것처럼 학자들은 낡은 이론을 수정하여 미래형 글쓰기로서의 수필을 담을 수 있는 이론을 정립해야 한다 수필 잡지사나 출판사들은 작품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매파로서 그 노릇을 기깔나게 해야 하며 독자는 작품을 볼 줄 아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리하여 수필이 얼마나 깊이 있고 아름다운 장르인지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한다

어쩌면 이 글이 수필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fun fun 하게 나를 청개구리라고 소개하고 청개구리가 수필을 논할 수 있는 것도 이 글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재미를 느꼈던 것처럼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입가에도 미소가 머물다 가기를 소심하게 바라본다

 

 

 

아재를 위한 TMI(Too Much Information)

1) 복세편살: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2) 존버: 존나 버티기, 존경스럽게 버티기

3) 인싸: 인사이더(insider)

4) 아싸: 아웃사이더(outsider)

4) 롬곡옾높: 폭풍눈물

5) 할많하않: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6) 얼죽아: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먹는다

7)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마음이 흡족하고 오줌을 지릴 정도로 대단하다

8) 쿠크다스 멘탈: 쉽게 부서지는 쿠크다스 과자처럼 정신력이 약하다

9) 트리플 A: 소심하다

10) 근자감: 근거 없는 자신감

11) 케바케: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 사람마다 다르다

12) 엄근진: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

13) 낄끼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진다

14) 갑툭튀: 갑자기 툭 튀어나온

15) 신박하다: 신기하다

16) 치트키(cheat key): 게임을 유리하게 하려고 만든 문장이나 프로그램

17) 기깔나다: 기가 막히게 대단하다

 

 

<계간현대수필> 여름호 (통권 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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