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316

그 이불을 덮고 / 나희덕

그 이불을 덮고 나희덕 노고단 올라가는 양지녘 바람이 불러 모은 마른 영혼들 졸참나무잎서어나무잎낙엽송잎당단풍잎 느티나무잎팽나무잎산벗나무잎너도밤나무잎 그 이불을 덮고 한겨울 어린 풀들이 한 열흘은 더 살다 간다 화엄사 뒷산 날개도 채 굳지 않은 날벌레들 벌써 눈뜨고 날아오겠다 그 속에 발 녹인 나도 여기서 한 닷새는 더 걸을 수 있겠다

시 - 필사 2022.02.14

닿고 싶은 곳 / 최문자

닿고 싶은 곳 최문자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시 - 필사 2022.01.25

역행 / 권영옥

역행 권영옥 한 화분에 베고니아 두 포기가 포개진 걸 사왔다 물 주고 영양제를 주어 둘은 밤마다 이슬 적시는 놀이에 빠진 줄 알았는데 시샘하고 밀어내어 한 포기가 명경을 포기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전생의 악연이 내외라는 말처럼 너희도 몸 속에 낯선 생각을 품고 이곳으로 왔구나 보이지 않게 뿌리와 뿌리가 자리다툼을 해서 한 꽃이 수렁 냄새를 풍긴다 몽글하던 외피가 겹겹 비늘에 싸여 서로에게 단맛이 되지 못하는 운명은 일찍 한 쪽을 저물게 한다 '겨울길'*에서 신부가 청년의 운명을 바꿔 한 청년이 파란 낙엽이 되고. 한 청년은 로맨스를 얻었다지, 풀밭을 얻었다지 가을 속에 서 있는 나는 잎 속에 담긴 빛을 모르고 눈앞의 그림자만 보인다 영혼의 발부리가 어둠에 닿은 탓이다 운명은 왜 한쪽으로만 편입되려 하는지 ..

시 - 필사 2022.01.25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 조정인

제1회 구지가 문학상 수상작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조정인 지금은 산사나무가 희게 타오르는 때, 나여. 어딜 가시는지?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내가 나를 경유하는 중이네. 흰 터번을 쓴 어린 수행자 같은 산사나무 수피를 더듬는다. 내가 나를 더듬고 짚어보고 헤아려 보듯, 나는 재에 묻혀 움트는 감자의 눈, 움트는 염소의 뿔, 움트는 붉은 승냥이의 심장, 봄 나무가 내민 팥알만 한 새순, 겨울 끄트머리에 걸린 시샘달* 방금 운명한 망자의 움푹 꺼진 눈두덩, 생겨나고 저무는 것들 속에 눈뜨는 질문. 나여, 나는 어디로부터 나를 만나러 산사나무 하얗게 타오르는 이 별에 왔나? 어제 나는 스물일곱에 요절한 나를 조문하고 왔네. 꽃 같은 얼굴이 웃고 있는 영정 앞에 예를 갖추고 향을 ..

시 - 필사 2022.01.21

밤에 쓴 말 / 오성일

밤에 쓴 말 오성일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겠습니다 고요히 나에게만 묻겠습니다 하늘의 별빛에도 마음 흔들리 수 있으니 우러르지 않겠습니다 눈 감겠습니다 도처에서 나를 노리 는 파행과 봉착, 눈을 뜨면 꿈꾸지 않은 길 위에 서 있을 수 도 있으나 가장 위독했 던 순간의 기억으로 길을 되물어 가겠습니다 이 외로움이 나의 방향감각입니다

시 - 필사 2022.01.11

꽃 보고도 웃지 못하는 저녁이 있어 / 오성일

꽃 보고도 웃지 못하는 저녁이 있어 오성일 나는 견디는 사람 내 아들을 견디는 사람 내 어머니는 견뎌낸 사람 나를 견뎌낸 사람 나는 좀 배우고 먹고는 살아 이럭저럭 내 아들을 견뎌내는데 이렇다 할 배움도 없이 밥도 없이 내 어머니 나를 어찌 견디셨는가 꽃 보고도 웃지 못하는 저녁이 있어 멈추어 자식의 일 생각하느니

시 - 필사 202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