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316

5구역 / 신정민

5구역 신정민 은밀한 데이트 장소로 공동묘지만한 곳이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후회와 함께 시작된 사랑은 묘역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 곁에 있어 들을 수 없었던 속삭임이 있었다 묻힌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죽음의 트럼펫 소리 누군가 오래도록 데니보이를 연습하고 있다 말이 필요 없는 데이트 모르는 자의 무덤 앞에 조화를 바치는 햇살들 인생은 요약되지 않아서 어려웠다 우리는 결국 모르는 사이 잊지 못할까 봐 잊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서 종종 만나곤 했다

시 - 필사 2021.12.14

사랑은 끝이 없다네 / 박노해

사랑은 끝이 없다네 박노해 사랑은 끝이 없다네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시간이 흘러서도 그대가 내 마음속을 걸어다니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강을 건너서도 그대가 내 가슴에 등불로 환하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대 이름만 떠올라도 푸드득, 한순간에 날아오르겠는가 그 겨울 새벽길에 하얗게 쓰러진 나를 어루만지던 너의 눈물 너의 기도 너의 입맞춤 눈보라 얼음산을 함께 떨며 넘었던 뜨거운 그 숨결이 이렇게도 생생한데 어떻게 사랑에 끝이 있겠는가 별로 타오른 우리의 사랑을 이제 너는 잊었다 해도 이제 너는 지워버렸다 해도 내 가슴에 그대로 피어나는 눈부신 그 얼굴 그 눈물의 너까지 어찌 지금의 네 것이겠는가 그 많은 세월이 흘러서도 가만히 눈감으면 상처 난 내 가슴은 따뜻해지..

시 - 필사 2021.12.14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시 - 필사 2021.12.14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걸기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시 - 필사 2021.11.03

저 폭포 / 김신용

저 폭포 김신용 저 폭포, 외줄기다 가느다란 물의 길이다 폭포라면 장엄해야 하는데 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내려 무엇을 무너뜨릴 듯 쏟아지는 질타 같아야 하는데 혼자서 오로지 외줄기다 산산이 부서지는 물거품도 없이, 혼자 먼 길 가는 것 같다 마치 산의 눈꺼풀 속에 숨겨져 있는 눈물샘 같은, 저 물줄기 - , 아무도 폭포라고 여기지 않는데도 홀로, 폭포이다 까마득한 벼랑에서 떨어져 내리는 가느다란 길이다

시 - 필사 2021.10.11

구름에 깃들어 / 천양희

구름에 깃들어 천양희 누가 내 발에 구름을 달아 놓았다 그 위를 두 발이 떠다닌다 발 어딘가, 구름에 걸려 넘어진다 生이 뜬구름같이 피어오른다 붕붕거린다 이건 터무니없는 낭설이다 나는 놀라서 머뭇거린다 하늘에서 하는 일을 나는 많이 놓쳤다 놓치다니! 이젠 구름 잡는 일이 시들해졌다 이 구름,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구름기둥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맹세이니 구름은 얼마나 많은 비를 버려서 가벼운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무거운가 구름에 깃들어 허공 한 채 업고 다닌 것이 한 세기가 되었다

시 - 필사 2021.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