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316

수의 / 이산하

수의 이산하 며칠째 눈이 내려 수의처럼 세상을 계속 덮는다. 나는 내가 몇 초 뒤에 뭘 생각할지도 모르고 내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죽을 때를 알아 4년 전부터 수의를 짜고 마침내 그날이 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준 ‘백 년 동안의 고독’ 속의 아마란타처럼 나는 아직 수의를 짜지도 못하고 설령 그날이 와도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먼지 같은 내 여윈 살 외에는 나눠줄 수가 없구나. 다만 아마란타처럼 내 많은 지인들이 먼저 죽은 이들에게 보낼 고해성사 편지를 써오면 내가 차질 없이 전해주겠다는 약속만은 꼭 지키리라. 수의가 세상을 돌돌 말아 관 속에 넣고 못을 박는다. * 인문교양 월간지 '이산하 시인의 짧은 시' 연재(2020.11)

시 - 필사 2021.09.28

사리재 옛길 / 강정숙

사리재 옛길 강정숙 물쑥대 우거진 갈대밭을 끼고 자전거와 사람이 함께 걷고 달리는 길 끝에 오래 묵은 버드나무 한 그루 쓰러져 있다 마치 세기말의 풍경같이 디귿자로 누운 나무는 둥치는 썩고 잎사귀만 살아있다 저 수많은 잎사귀는 나무가 내뱉는 신음 같아 그 앞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오금이 당긴다 내 죄가 아니지만 내 죄인 것만 같고 더 이상 희망이 없는데도 살아보겠다고 안감힘 쓰는 임종 앞둔 병자 같고 일주일에 세 번 혈액 투석을 받으며 겨우겨우 연명하는 그녀 같다 이 세상 하직하기가 도무지 쉽지 않은 나무를 위해 넘치는 곡哭으로 비통을 달래주는 공릉천, 다음 생을 기약하듯 습지를 적신다 버드나무 가지마다 바람이 인다 올해는 또 어떤 비가 내려 버드나무 한 그루 쿵, 넘어뜨리려나 잊혀져 가는 옛날처럼 ..

시 - 필사 2021.09.24

어머니와 호미 / 김용만

어머니와 호미 김용만 여쨌든 돌은 무겁다 오랜 세월 하고 싶은 말들 가슴에 묻고 살았기 때문이다 돌멩이는 흙의 사리다 어머니는 이 세상 사리다 나는 오늘 밭에서 돌을 줍다 자루 빠진 호미 하나 주웠다 막막한 세상 얼마나 후벼 팠을까 내 정신 좀 봐 띈전띈전 저 호미 찾았을까 닳고 닳아 가벼워진 요양병원 어머니인 듯 애리다 울다 지친 눈부신 봄날 어머니가 밭 가상에 돌 던지던 소리 얼마나 깊고 아득했던가 자꾸만 호미 끝에 치이는 돌멩이들 서럽게 울어쌓는 산비둘기들

시 - 필사 2021.09.19

시詩가 나에게 / 유안진

시詩가 나에게 유안진 아직도 모르겠어? 한번 발들이면 절대로 못 빠져나오는 사이비종교가 '나'라는 것을 받침 하나가 모자라서 이신 신神이 못되는 어눌한 말인 걸 쓸수록 배고파지는 끝없는 허기 쓰고 보면 제정신 아닌 남루뿐인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소설가 화가 음악가... 와는 달라서 만 번을 고쳐죽어도 일가는 못되느니 시 쓰며 인간이나 되라고 아닌가 꿈 깨게, 문여기인文如其人 잊지 말고.

시 - 필사 2021.09.08

간발 / 황인숙

간발 황인숙 앞자리에 흘린 지갑을 싣고 막 떠나간 택시 오늘따라 지갑이 두둑도 했지 애가 타네, 애가 타 당첨 번호에서 하나씩 많거나 적은 내 로또의 숫자들 간발의 차이 중요하여라 시가 되는지 안 되는지도 간발의 차이 간발의 차이로 말이 많아지고, 할 말이 없어지고 떠올렸던 시상이 간발 차이로 날아가고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치고 길을 놓치고 날짜를 놓치고 사람을 놓치고 간발의 차이로 슬픔을 놓치고 슬픔을 표할 타이밍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네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뺨을 푸들거리며 놓친 건 죄다 간발의 차이인 것 같지 누군가 써버린 지 오랜 탐스런 비유도 간발로 놓친 것 같지 간발의 차이에 놓치기만 했을까 잡기도 했겠지, 생기기도 했겠지 간발의 차이로 내 목숨 태어나고 숱한 간발 차이로 지금 내가 이러고 있..

시 - 필사 2021.09.08

작은 완성을 향한 고백 / 이면우

작은 완성을 향한 고백 이면우 술, 담배를 끊고 세상이 확 넓어졌다 그만큼 내가 작아진 게다 다른 세상과 통하는 쪽문을 닫고 눈에 띄게 하루가 길어졌다 이게 바로 고독의 힘일게다 함께 껄껄대던 날들도 좋았다 그 때는 섞이지 못하던 뒤꼭지가 가려웠다 그러니 애초에 나는 훌륭한 사람으로는 글러먹은 거다 생활이 단순해지니 슬픔이 찾아왔다 내 어깨를 툭 치고 빙긋이 웃는다 그렇다 슬픔의 힘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제는 내가 꼭 해야 할 일만을 하기로 했다 노동과 목욕, 가끔 설겆이, 우는 애 얼르기, 좋은 책 읽기, 쓰레기 적게 만들기, 사는 속도 줄이기, 작은 적선, 지금 나는 유산상속을 받은 듯 장래가 넉넉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작아져도 괜찮다 여름 황혼 하루살이보다 더 작아져도 괜찮다 그리..

시 - 필사 202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