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316

미풍해장국 / 오성일

미풍해장국 오성일 사무실 앞 미풍해장국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제 밤부터 불이 꺼져 있더니 오늘 낮까지 문이 잠겨 있습니다 문 닫힌 한낮의 식당 안을 들여다보는 건 왠지 섭섭하고 걱정이 드는 일입니다 해장국의 뜨뜻하고 뿌연 김이 가라앉은 식당에선 유리문 사이로 서러운 비린내 같은 게 새 나옵니다 옆 건물 콜센터의 상담원 처녀들이 늦은 밤 소주 댓 병과 함께 뱉어낸 고객님들의 안다구니와 욕지기들도 식당 바닥 찬물 위에 굳은 기름으로 떠 있습니다 의자와 정수기와 도마와 탁자와 계산대는 다들 앞길이 막막하다는 표정으로 그늘 속에 반쯤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나는 젊은 주인 내외가 무슨 상이라도 당했으려니 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너무 슬픈 나머지 쪽지 하나 붙이고 가는 일 깜빡했으려니 짐작하면서 하루 이틀 더 기다..

시 - 필사 2022.03.29

나쁜 시절 / 류근

나쁜 시절 류근 10년씩 배경을 뛰어넘는 드라마처럼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으면 좋겠네 숙취에 떠밀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한 국자 비워져 버린 간밤의 기억처럼 시간이 그렇게 큰 걸음으로 풍덩풍덩 달려가 줬으면 좋겠네 내게로 쏟아져 내리는 미분의 시간들 아침에서 저녁으로 이르는 길이 천축보다 멀고 밤마다 시간이 떨어뜨린 눈썹이 죽은 모래의 뼛조각으로 떠밀려 가네 한 시절 건너가는 일이 거미줄을 밟고 가듯 허공에 발자국 새기는 일처럼 아득하여서 내 절망은 적분 같은 것이네 죽는 날까지 한순간도 빠짐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 시간이 쪼아대는 부리를 견디며 살아남는 것만이 희망인 목숨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 건너가는 것만이 구원인 목숨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두어 달쯤 앞당겨 잘못 찢어낸 달력처럼 짐짓 빈 정류장을 지..

시 - 필사 2022.03.29

믿었던 사람 / 이덕규

믿었던 사람 이덕규 믿었던 사람 속에서 갑자기 사나운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 나에게 달려들었다 개는 쓰러진 나를 향해 한참을 으르렁거리다가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믿었던 사람이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우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조금 전 당신 속에서 뛰쳐나왔던 그 개는 어디로 갔느냐고 되묻자 믿었던 사람은 가슴을 열고 더 무서운 개 한 마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개 말이오? 나는 결국 사람에게 지는 사람이다 나는 늘 사람에게 지면서도 그 흔한 위로의 반려견 한 마리 키우지 못하는 것은 오래전 내 안에 키우더 자성의 개 비린내 나는 송곳니에게 호되게 물렸기 때문이다 견성한 개는 주인을 물어 죽이기도 한다 내가 키웠던 개들은 매번 주인을 물어뜯는 개로 자라서 나는 나에게도 지는 그런 슬픈 사람이다

시 - 필사 2022.03.13

근본 없다는 말 / 김명기

근본 없다는 말 김명기 마당가 배롱나무 두 그루에 꽃이 한창이다 한 그루는 장날 뿌리째 사다 심었고 한 뼘쯤 더 자란 나무는 가지를 베어 꺾꽂이했다 뿌리째 심은 나무는 사방 고르게 가지를 뻗어 꽃 피우고 베어 심은 것은 뿌리내리며 가지를 뻗느라 멋대로 웃자랐다 그중 제일 먼저 뻗은 가지는 땅을 향해 자란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을 힘 다해 살았겠지 기댈 데가 없다는 건 외롭고 위태롭다 죽을 수가 없어 죽을 힘 다하는 생 뿌리가 얼마나 궁금했으면 아직도 땅을 향해 자라날까 무심코 내뱉는 근본 없다는 말에는 있는 힘 다해 뿌리내리며 허공을 밀어 올리는 수없는 꺾꽂이 같은 삶이 깊숙이 배어 있다

시 - 필사 2022.03.05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 이어령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이어령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운율은 출렁이는 파도에서 배우고 음조의 변화는 더 썰물과 밀물을 닮아야 한다. 작은 물방울의 진동이 파도가 되고 파도의 융기가 바다 전체의 해류가 되는 신비하고 무한한 연속성이여 시의 언어들을 여름바다처럼 늘 움직이게 하라 시인의 언어는 늪처럼 썩는 물이 아니다. 소금기가 많은 바닷물은 부패하지 않지만 늘 목마른 갈증의 물 때로는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갈증을 겨디며 무거운 짐을 쉽게 나르는 짐승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시 - 필사 2022.03.05

녹색 감자 / 배경희

녹색 감자 배경희 감자는 죄가 있어 햇빛을 싫어하니 망치와 TV가 브로콜리 잘라내듯 칼날은 그 식물들을 쉽게 쳐 내려간다 의심과 거짓말을 일삼는 신문들은 흰색은 그냥 싫어 이유 없는 이유야 모든 귀 막아버리고 검은 죄를 생산하고 다 털고 털어봐 우리는 감자를 믿어 기억하니 때때로 칼날 꽉 문 단단한 무를 햇빛 든 녹색 감자의 혁명이 두려울 거야 『시조미학』(2021, 겨울호)

시 - 필사 2022.02.14

말랑말랑한 그늘 / 박희정

말랑말랑한 그늘 박희정 한여름 볕살들이 드러누운 대서大暑 무렵 내 오랜 그리움이 말랑말랑 겹쳐와 서운암 낮은 길목에 사뿐 내려 앉는다 눈길 머문 야생화와 고분한 물길 사이 바람처럼 맴도는 기억, 숨바꼭질하려는지 까무룩, 그림자 길어지고 너는 멀어지고 쟁쟁한 잔돌들과 종요로운 풍경들과 오랜 향기 꼭꼭 채운 장독대 언저리마다 우련히 깃드는 그늘, 너는 술래가 된다 《시조미학》 2021년 겨울호

시 - 필사 2022.02.14

저녁의 두부 / 서숙희

저녁의 두부 서숙희 두부를 만지는 두부 같은 저녁은 적당하게 무르고 적당하게 단단하다 꾹 다문, 입이 몸이고 몸이 입인 흰 은유 으깨져 닫혀버린 축축한 기억들 경계도 격정도 고요히 순장되어 창백한 무덤으로 앉은 한 덩이 직육면체 잔뼈처럼 가지런한 알전구 불빛 아래 표정 없이 저무는 식물성 적막 속으로 수척한 자폐의 저녁이 허기처럼 고인다 -《시조21 》2021년 겨울호

시 - 필사 2022.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