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316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질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스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메어 올 적이며..

시 - 필사 2022.06.15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 백석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백석 나는 이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뚜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군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 안으로 가면 뒤을 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마당귀 연자간 잎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당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

시 - 필사 2022.06.15

맹인들의 호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맹인들의 호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이 맹인들 앞에서 시를 낭송한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목소리가 떨린다. 손도 떨린다. 여기서는 문장 하나하나가 어둠 속의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처럼 느껴진다. 빛이나 색조의 도움 없이 홀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의 시에서 별빛은 위험한 모험이다. 먼동, 무지개, 구름, 네온사인, 달빛, 여태껏 수면 위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던 물고기와 높은 창공을 소리 없이 날던 매도 마찬가지. 계속해서 읽는다 - 그만두기엔 너무 늦었기에 - 초록빛 풀밭 위를 달려가는 노란 점퍼의 사내아이, 눈으로 개수를 헤아릴 수 있는 골짜기의 붉은 지붕들, 운동선수의 유니폼에서 꿈틀거리는 등번호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벌거벗은 낯선 여인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싶다 - ..

시 - 필사 2022.05.21

공짜는 없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공짜는 없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공짜는 없다. 모든 것은 다 빌려온 것이다. 내 목소리는 내 귀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 자, 여기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다. 심장은 반납 예정이고, 간도 돌려주기로 되어 있다. 물론 개별적인 손가락과 발가락도 마찬가지. 계약서를 찢어버리기엔 이미 늦었다. 내가 진 빚들은 전부 깨끗이 청산될 예정. 내 털을 깎고, 내 가죽을 벗겨서라도. 나는 채무자들로 북적대는 세상 속을 조용히 걸어 다닌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날개에 대한 부채를 갚으라는 압력에 시달리는 중. 또 다른 이들은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나뭇잎 하나하나마다 셈을 치르는 중. 우리 안의 세포 조직은 송두리..

시 - 필사 2022.05.21

일요일에 심장에게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일요일에 심장에게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보태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아서, 타고난 성실성과 부지런함에 대해 그 어떤 보상도, 아첨도 요구하지 않아서. 너는 1분에 70번의 공로를 세우고 있구나. 네 모든 수축은 마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조각배를 바다 한가운데로 힘차게 밀어내는 것 같구나.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한 번, 또 한 번, 나를 전체에서 분리시켜줘서, 심지어 꿈에서조차 따로 있게 해줘서. 내가 늦잠을 자지 않고 비행시간에 맞출 수 있게 해줘서. 날개가 필요 없는 비행 말야.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내가 또다시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해주어서, 비록 오늘은 일요일, 안식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날이지만, 내 갈비뼈 바로 아래쪽에선 휴일을 코앞에 둔 분주하고, ..

시 - 필사 2022.05.21

남편 / 한필애

남편 한필애 오늘도 먹이 사냥에 나서는 우리 집 수렵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내딛는 걸음 어느새 뒤꿈치 다 닳았네 젊어 호기롭던 시절 이 산등 저 골짝 핑핑 날 적에도 까투리 장끼는 키를 넘어 날았지 더 넓은 사냥터 사우디아라비아 메마른 사막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빗맞은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곤 하였지 돌부리에 넘어지고 또 절뚝거리며 먹이를 나른 수렵의 세월 너와집 굴피같은 거친 손으로 활을 만지작거리며 중얼중얼 이제 연장이 너무 낡았군, 하는데 수십 년 사냥질에 대호 한 마리 메고 온 적 없지만 저 사냥꾼 가슴을 늘 아리게 하네

시 - 필사 2022.04.28

사막으로 가라 / 한필애

사막으로 가라 한필애 체증으로 가슴이 답답하면 초원사막으로 가라 가서 은하수를 만지거라 벌컥벌컥 마셔도 보고 첨벙첨벙 건너도 보아라 홀로 건너기 외로우면 낙타와 함께하라 하루 종일 소소초를 씹는 낙타도 맑은 물로 비린내를 헹굴 것이니 양가죽 냄새 퀴퀴한 게르에서 낙타가 오기를 기다려라 전갈들 모래 바닥 기어 다니고 먼 데서 온 네가 궁금해 사막여우가 어슬렁거리다 제 굴로 돌아가면 사막의 밤을 가만히 내다보라 거기 또 별들 쏟아져 발목에 쌓일 것이니 떠나라

시 - 필사 2022.04.28

그런, 미나리 / 강정숙

그런, 미나리 강정숙 사는 게 늘 뻘밭이기만 했을까 가늘고 여린 허리로 주춧돌을 세울 때도 있었지 그런 날을 견디느라 저 작은 잎들은 부신 빛을 끌어들었지 전원주택 단지인 그 동네 언덕 아래 오래된 집 납작한 단칸방에서 낡고 얼룩덜룩한 벽지를 뜯어내고 눈꽃같이 포근한 벽지로 되배될 방을 꿈꾸며 겨울이면 따스한 불빛의 전구를 달고 여름이면 작은 선풍기를 돌려 바람을 안아 들이던, 길가로 난 작은 창엔 사철 수런수런 발걸음 소리,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고 밤이면 들창을 닫아건 뒤 불 탁 끄고 잠자리에 들 때의 그 아늑하고 달콤했을 사랑의 정처 그리하여 파릇한 새 계절 오면 몸에 물 올리고 향내 들였으나 고인 물속 거머리 떼 장딴지에 기어올라 새빨갛게 피 빨리고 속잎 누렇게 떠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던 그 아픈..

시 - 필사 2022.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