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316

시詩가 나에게 / 유안진

시詩가 나에게 유안진 아직도 모르겠어? 한번 발들이면 절대로 못 빠져나오는 사이비종교가 ‘나’라는 것을 받침 하나가 모자라서 이신 신神이 못되는 어눌한 말인 걸 쓸수록 배고파지는 끝없는 허기 쓰고 보면 제정신 아닌 남루뿐인 ​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소설가 화가 음악가… 와는 달라서 만 번을 고쳐죽어도 일가는 못되느니 시 쓰며 인간이나 되라고 아닌가 꿈 깨게, 문여기인文如其人 잊지 말고.

시 - 필사 2021.08.17

경이로움 / 비스와라 쉼보르스카

경이로움 비스와라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거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 번뿐인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 왜 하필 옆자리도 아니..

시 - 필사 2021.08.15

천성 / 박경리

천성 박경리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나는 안했다 결벽증,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싫은 일도 나는 하지 않았다 못된 오만과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를 반기지 않는 친척이나 친구 집에는 발검음을 끊었다 자식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실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이 경우 자식들은 예외였다 그와 같은 연고로 사람 관계가 어려웠고 살기가 힘들었다 만약에 내가 천성을 바꾸어 남이 싫어하는 짓도 하고 내가 싫은 말도 하고 그랬으면 살기가 좀 편안했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며 지레 지쳐서 명줄이 줄었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무덤덤하며 가진 것이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

시 - 필사 2021.08.10

등 / 이정록

등 이정록 암만 가려워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 첫애 업었을 때 아기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다 새근새근 새털 같은 콧김으로 내 젖은 흙을 말리던 곳이다 아기가 자라 어딘가에서 홧김을 내뿜을 때마다 등짝은 오그라드는 것이다 까치발을 딛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손차양하고 멀리 내다본다 오래도록 햇살을 업어보지만 얼음이 잡히는 북쪽 언덕이 있다 언 입술 오물거리는 약숟가락만한 응달이 있다 -계간 2021년 봄호

시 - 필사 2021.07.29

지는 사랑 / 권혁소

지는 사랑 권혁소 낡아보니 사랑할 나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겠다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나이만큼만 사랑을 할 뿐 그런 건 없다, 하물며 이제 막 헤엄치기를 마치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그대에게야 말해 뭣 하겠는가 사랑을 잃고 시를 얻다니, 이런 행위가 삶을 경외하는 마지막 자세라고 슬픈 자위를 해보긴 하지만 더 많은 상처를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는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휘파람을 불어주는 일도 버겁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랑이 저문다 숨자, 어느 숲에든 몰래 들어가 조용한 바람에도 격하게 이파리를 떠는 관목灌木이라도 되자, 그대와 나 비록 실패하는 사랑에 매진했으나 아직 세상엔 못다 한 사랑이 많이 남았으니 사랑이 진다고 싸움을 부를 일만은 아니다 저무는..

시 - 필사 2021.07.26

악의 평범성2 / 이산하

악의 평범성2 이산하 "불교 승려들이 숲을 지날 때 혹 밟을지도 모르는 풀벌레들에게 미리 피할 기회를 주기 위해 방울을 달고 천천히 걷는다는 말에 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얼마나 많은 생물들을 밟아버렸던가." 득음의 경지에 이른 어느 고승이나 성자의 얘기가 아니다.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한 나치 친위대장 하일리히 히믈러의 말이다. 전 친위대원을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만들고 가난하고 소박한 생을 최고의 삶으로 꿈꾼 사람이기도 했다.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시 - 필사 2021.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