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316

모르는 영역 / 권영옥

모르는 영역 권영옥 땅을 짚어도 무중력 속인 나는 얼마나 가벼운지 어떤 향기가 누르는 달꽃 우리 보폭이 넓어지고 있어요 당신에게 왔다는 것이, 달의 비늘이었다는 것이 서로의 뺨을 비비는 일이죠 이 섬에는 달맞이꽃 향기가 나요 봄엔 집과 뜰에 이 꽃을 심어야지 생각하죠 달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당신 그윽한 눈동자를 가슴에만 넣고 이제 천 년 동안 잊고 살아가야 하는데 12월의 갈매기 눈빛도 젖어 있어요 당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기억하려는 찰나 바람이 섬의 끝자락으로 데려가네요 파도의 기포들이 들끓어요 바글바글 우리 수신호 해요 나는 기억의 향기로 날았다가 식은 향기로 말하다가 웃다가 찡그리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만 하고 있어요 엄마 안녕!

시 - 필사 2021.04.26

꽃이 찌른다 / 권영옥

꽃이 찌른다 권영옥 난방 방열기 소리와 헐겁게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새끼를 많이 낳은 개가 자식들이 안 보이자 유리판을 긁어대며 간헐적 울음을 토해낸다 소리와 소리의 충돌이 낡은 폐를 돌리며 가슴에 있는 먹구름을 쏟아낸다 깜빡이는 전구가 혼자서 공중그네를 탈 때 저녁 건초더미에서 건져 올린 카네이션꽃다발에 먼지 흙을 본다 천 조각의 글씨가 십여 년 전의 웃음을 몰고 간 생일 축하케잌이다 이승의 살이 빠져나간 목도리처럼 엄마는 밤새 그 밤새 구급차 속에서 요단강의 물 주름을 움켜주었다고 하고 섣달 긴 밤에는 장롱만 뒤적이다 새벽 찬바람을 맞이했다는 후문이다 가슴 유리창에 낀 성애꽃 같다 나의 밤은 그때의 밤처럼 물 주름을 지탱하고 있다

시 - 필사 2021.04.26

자코메티의 언어로 / 조현석

자코메티의 언어로 조현석 출근 후 컴퓨터 바탕화면의 작은 모래시계만 응시한다 작은 구멍 비집고 빠져 나가려는 비만의 모래들 언제 멈출지 모를 셀 수 없는 불안 하나하나 헤아린다 잔혹한 햇살, 배려 없는 그늘, 뜨거운 바람의 채찍이여 땡볕 속 지치지 않고 말라갔으니 나 죽기 직전이다 온 뼈마디마다 살려 달라, 고왔던 청춘 돌려 달라 소리지른다 모래가 다시 돌아올 날 기다리며 은하수 위에서 노를 저었다 그 사이 숨 쉴 틈 없이 돌아나가는 회오리의 생각을 나무란다 하루의 청춘 홀랑 태워 뼈만 남은 퇴근길은 지독하게 아득하다 말라비틀어진 생각 하나가 살찐 몸뚱어리를 측은해 한다

시 - 필사 2021.04.07

역병이 돌던 여름 / 이상국

역병이 돌던 여름 이상국 역병이 돌던 여름 백일홍이 피자 동네가 환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피해 다니던 말든 때가 되면 꽃은 사정없이 핀다 꽃은 사람에게 겁먹지 않는다 사랑하지도 않는다 저 자신으로 꽃일 뿐 꽃도 병들고 아플 때가 있겠지만 저들은 마스크를 하거나 꽃이 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벌 받은 것처럼 조용한 여름 백일홍 꽃숭어리들이 바이러스처럼 붉다

시 - 필사 2021.02.17

비보호 좌회전 / 복효근

비보호 좌회전 복효근 알아서 가라는 뜻일 게다 보호해 주지 않을 테니 책임지지 않을 테니 니 인생 니가 알아서 살라는 뜻 겁박이거나 책임 회피거나 시험의 기미가 농후하다 이 땅에서 왼쪽은 언제나 위험한 곳 숟가락을 왼손으로 잡아들면 대가리부터 쥐어박혔다 반대 차선에서 멀리 한 대가 다가오는데 망설이자니 뒤차가 경적을 울린다 이건 자율의 뜻이라고 직진 신호에도 좌회전할 수 있으니 허용의 뜻이라고 왜 만사를 삐딱하게 바라보느냐고 한 말씀 하시는 것 같다 자율과 자유는 어떻게 다른가 직진 신호에서 좌회전하다가 골로 간 사람 더러 있다 노조에 가입했다가 나는 좌빨 소리도 들었고 짤릴 뻔도 하였으니 외야의 좌익수마저도 불안해 보인다 어쩌다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뒤로 저 애매한 시그널 앞에서 겁 많은 이 작자는 잠시..

시 - 필사 2021.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