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316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 - 필사 2021.01.06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시 - 필사 2021.01.06

코로나 학번 / 류근

코로나 학번 류근 재수를 하고서야 간신히 대학에 입학한 아들 아침마다 갈 곳이 없다 학교는 분명 거기쯤 있을 텐데 갈 데가 없다 입학식에 입으려고 작년부터 준비해 둔 양복 요즘 누가 입학식에 그런 걸 입느냐며 온갖 놀림에도 아랑곳없이 다려두었던 그 양복 옷장에서 한 번도 나온 적 없다 입학식도 없이 개강 첫날의 촌스러움도 없이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는 동안 학교 한 번 못 가보고도 대학생은 대학생 모니터 속 교수는 아들의 얼굴을 모르고 아들은 학교 가는 버스 노선을 모르고 나는 집에서 빈둥거리는 아들의 정체를 모르고 학교는 언제 문이 열릴지 모르고 바리러스는 얼제 사람을 지나칠지 모르고 모르고 모르고 온통 모르고 이 자욱한 몽롱의 담장 너머 캠퍼스엔 꽃이 피고 여전히 등록금 고지서는 펄럭이고 아들은 ..

시 - 필사 2020.12.31

불침번(不寢番) / 유안진

불침번(不寢番) 유안진 가끔 때로는 자주 어지럽다 지구가 쉬지 않고 돌고 있다는데 왜들 어지럽지 않다는가? 자전(自轉)에서 공전(公轉)까지 하느라고 지친 나머지 튕겨나가거나 굴러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누구라도 있어야지 '성질이 팔자' 라는 속언대로 나 하나가 무슨 위안(慰安) 될까마는 그래도 잠들 수가 없는데 10년 담당의사는 약(藥)만 바꿔주거나 한두 알씩 보태주기만 한다. ㅡ《시인시대》2020년 겨울호

시 - 필사 2020.12.25

후레자식 / 오봉옥

후레자식 오봉옥 울 아덜은 하늘이 내린 자석이라우 울 어매 날 두고 단 한번도 당신이 낳은 자식이라 하지 않았네 내가 사고 쳐 속 썩일 때에도 회초리 대신 눈물 글썽거리시며 태몽이야길 꺼내곤 했지 글씨, 마당에 비양기 한 대가 떨어졌시야 학 한 마리가 영판 멋드러지게 내려오드라 그게 니다 긍께 넌 하늘이 내려준 자석 아니냐 그런 울 어매 돌아가셨는데 난 참 좋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전화하던 치매 걸린 어매 목소리 듣지 않으니 좋고 이젠 가슴 졸이며 잘 일도 없으니 이보다 더 홀가분 할 순 없네 -계간 2020년 겨울호

시 - 필사 2020.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