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진부한 시 / 하태성

칠부능선 2021. 6. 4. 10:30

진부한 시

하태성

 

 

아내는 내 시가 진부하다고 한다

밥 먹다가도 티브이를 보다가도

젊은 사람드의 정서와 맞지 않다고

영화를 보다가도 타박을 늘어놓는다

60년대 농촌 이야기라고 70년대 공장 이야기라고

삶의 질이 바뀌고 생활이 윤택해졌는데

아직도 잘린 손가락과 공장에서 쫓겨난 이야기뿐이라고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인데

정보의 바다를 건기도 헤엄치기도 버거운데

아직도 진부한 노동자의 이야기와 농부들의 이야기뿐이라고

돈만 있으면 두 시간이면 서울에서 부산을 가고 

유럽도 별나라도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

아직도 잘린 손가락과 해도당한 노동자 얼굴 그려가며

귀동냥 풍월로 남의 이야기만 시대의 양심처럼 오래한다고 

돈도 되지 못하고 시대의 양심은 더더욱 되지 못하는

잘려나간 손가락이 없어지고 해고 위협에서 자유로운 

노동자와 농부의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는 날

나의 시가 진부함이 아니라 유치찬란한 감성의 시작이고

부질없는 푸념과 기우가 되는 그런 날이 오면

그때 다시 물어다오 아내여!

나의 시가 진짜 지부한 감정의 사치였느냐고

 

 

 

시집 <불량 시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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