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국경을 넘는 일 / 하태성

칠부능선 2021. 6. 4. 11:01

국경을 넘는 일 

하태성

 

불가리아에서 세르비아로 가는 국경

길게 늘어선 입출국 검문소에서

총을 든 국경수비대의 눈빛은 삼엄하다

승용차 밖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죄를 지은 것도 없고 잘못 살아온 것도 아닌데

심장이 벌떡이고 손이 떨렸다

여기서 잘못되면 돌아가지도 못하리라

스산한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오는데

좁은 통로에 난데없는 누렁이 한 마리

어슬렁거리며 국경을 넘는다

불가리아에 있는 강아지에게 젖 물리고

세르비아 국경수비대에 몸을 비벼댄다

여권 없이도 국경을 넘나든다

사람들이 가로질러 놓은 경계는

개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개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선이다

개들에게만 있는 권리이다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는 여권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는 국경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있는 분단

나는 단 한 번도 걸어서 국경을 넘던 기억이 없다

분단의 한반도를 분단의 아픈 역사를 

개들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개들보다 못한 자유가 있다는 것을

타인의 국경을 넘으며 내 조국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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