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통 큰 아내 / 권영옥

칠부능선 2021. 6. 7. 11:56

통 큰 아내

권영옥

 

 

 

빼내다와 관계되는 연상 언어에는 진절머리가 들어 있다

 

참나무 뿌리와 뿌리 사이에 작은 바위가 끼어있어

죽어가는 노인의 억지 과신처럼 아내의 발부리가

시커멓게 주저앉는다

 

뽑아내고 빼내야 한다는 한 생각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고통은 죽음과 연결된다는 걸 안다

 

함백산 아랫동네에 사는 노인이 겨울을 나는 동안 눈바람이 되셨다. 영정 앞에는 가족과 가족의

합의 없이 만난 한 여인이 다리를 뻗친 채 울고 계신다. 여기에 오기 전 그녀는 참나무에 제 식의

조등을 걸어놓고, 붉은 가넷반지 위에 검은 눈물을 떨어뜨리셨다. 느슨해진 부부 속에 끼어들어

그녀가 화염방사기로 한 가슴을 새까많게 태우셨다

 

빈소의 촛불이

광기로 출렁이던 그때처럼 이글이글 한 지점을 향한다

 

불나방의 굴광성을 본 아내는 바닫을 꽉 잡고 눈을 감는다

 

두 사람의 마찰 기억이란

얼마나 많은 재 무덤을 쌓았을까만은 아내는 조명가게에서

여우꼬리 이름으로 된 문패를 걸어주고 나온다

 

눈바람이 날리는 가운데 참나무가 묵묵히 염주를 돌리고 있다

아사 치마가 참나무를 휘감던 봄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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