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ㅅ / 윤은영

칠부능선 2021. 7. 9. 07:58

윤은영

 

 

어릴 적 나는 늘 나무를 거꾸로 뒤집어놓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늘과 땅이 뒤집히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서기는 반에서 글시를 제일 잘 쓰는 아이

서기는 나만 할 수 있는 나에게만 뜨거운 직책

서기는 꼭 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단단한 뜻을 가진 동사의 명사형

 

나는 서기에 임명되어야만 했다 위독했던 할머니를 뒤로하고 개학 전날 서기가 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할머니는 개학날 돌아가셨고 나는 서기를 포기하기 싫어 장례식을 포기했다 과연 나는 나쁜 사람일까

 

서기가 되면 매일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의 눈길을 받을 수 있어 도망간 엄마 나를 내팽개친 아빠를 잊을 수 있어 학교는 기쁨 학교는 늘 서 있는 곳

 

꿈에서 내 심장을 갈라 보았다 시옷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새겨놓은 것인지 태어날 때부터 새겨져 있던 것인지 참 궁금했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두 다리를 움직이지 않는 게임

휘청거리는 것까지는 인정 발을 먼저 떼는 사람이 패배

발바닥에 힘을 꽉 주어 몸을 지탱하면 이기는 게임

세상이라는 밑변을 디디고 서서 꼭지각이 같게 두 다리로 만드는 이등변삼각형

 

그러므로 내게 서기는 언제까지나 시옷처럼 랄랄라

 

 

 

<시옷처럼 랄라라> 시집에서

'시 -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허가 / 김계수  (0) 2021.07.09
길을 내다 / 김계수  (0) 2021.07.09
그냥 나무 하나 / 조현석  (0) 2021.07.05
작가적 품위 / 오인덕  (0) 2021.06.22
통 큰 아내 / 권영옥  (0) 2021.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