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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죽었다

금요일 아침, 어머니가 거동이 없으시다. 아버님 얼굴이 하야져서 어젯밤에 겨우 부축해서 화장실을 다녀오셨다고 한다. 어머니가 어지럽다며 못 일어나시겠단다. 다리에 힘이 없다. 중심이 안 잡힌다. 다니던 병원에 부탁해서 간호사가 와서 링거를 맞혀드렸다. 우선 기운을 차려서 병원을 가려고... 토요일, 냄편과 함께 양쪽에서 부축해서 용하다는 이비인후과에 갔다. 신경과 내과, 외과에서 별 이상이 없다하고, 달팽이관 이상으로 어지럼증이 올 수도 있다고 하니까. 이곳에서는 검사 자체가 부정확하단다. 의사의 지시를 제대로 따를 수가 없으니. 일요일 집에서 쉬고, 어제, 오늘은 아버님과 함께 양쪽에서 부축해서 용하다는 한의원을 다녀왔다. 초진을 3개월 기다려야 한다는데, 몇 다리 걸쳐 겨우 예약을 하고 5시 40분에..

'문학은 나의 방부제'

에세이플러스 송년모임에 소설가 박범신을 초대했다. 강연 주제가 이었다. 작가로 향기롭게 살아남는 법. ㅋㅋ 멋진 말이다. 그러나 작가라는 직업이 '성질 더러운 년'과 37년동안 산 느낌이라면서 우찌... 향기로울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정상이 아닌, 나만의 정상을 향해 오르는 알파인스타일의 사람. 자본주의, 고정관념, 편견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사람. 언제나 뜨겁거나 차가워질 수 있는 사람. 끊임없이 독자에게 작업 걸고 있는 사람. 자유로움이 많은 삶이었다고 자부하는 사람. 그리하여 문학이 자신의 삶에 방부제가 되는 사람. 강의가 끝난 후 뭔가 희망적인 느낌이 온 건 다행이다. 향기를 풍길 수 있으려나. 언감생심 꿈도 꾸게 되네. Porcupine Tree - How Is Your ..

잘 노는 일

딸이 2주 동안 일본에 있는 제 집에 다녀온다고 엄만 휴가를 잘 즐기라 했다. 카나다에서 2년에 한번씩 오는 시누이가 친구라서, 함께 밀린 친구만나기에 바쁘다. 7,8년 못 만난 친구들까지... 딸이 친구들과 놀라고 양양에 있는 펜션까지 예약해 주고 갔으니 다음주에는 좀 더 열심히 놀아야 한다. 요즘 내내 하는 말이다. 중간중간 공식행사, 지난주엔 호세 카레라스 공연 보고, 좋아하는 베이스 이연성의 러시아음악 공연도 가고, 그 중간에 아들과 김장훈 콘서트에 가서 소리소리 지르기도 하고. 주말엔 결혼식, 숙제는 밀리고... 병나지 않은 게 감사할 지경이다. 어제는 후배의 멋진 논문을 읽으며 칭찬을 늘어지게 하면서... 속으론 좀 많이 반성했다. 내 게으름에 대하여, 내 한계에 대하여, 아, 이런 기분이겠구..

일, 일, 일

피할 수 없는 인사치레들로 정신이 없다. 딸이 아기를 데리고 왔다. 이 천사는 낮과 밤이 바뀌어서 밤잠을 설치게 한다. 이제 한달된 신생아가 지 분수를 모르고 똘망똘망 놀자고 한다. 백일 무렵까지는 먹고자고 먹고자고 해야 살도 오르고 무럭무럭 크는 건데 말이다. 아기 보러 친구, 친척들 오가고... 한달간 충성을 다 하리라 다짐했는데 자꾸 일이 생긴다. 어제는 아들 아이의 상견례를 했다. 딸아이 때 해 봤는데도 여전히 어렵고 어색한 자리다. 아이들 칭찬으로 핑퐁게임을 너댓번 주고받고, 이런 걸 립써비스라 하는지... 따끈한 정종이 오고가니 얼굴이 붉어지고 긴장이 풀어질 즈음 헤어졌다. 손목이 시리다. 다친 손가락도 아직 삐져있다. 내 말을 듣지 않는 내 몸이 먼저 할머니가 되었음을 인식시킨다. 몸 뿐인가..

어니 그레엄

* 살짝 남은 여름의 끝자락 한낮 볕은 뜨겁게 과실을 익히고 잔잔 바람은 머리카락을 날리는데 왜 이리 마음은 수선한지. 여기, 좌익도 우익도 아닌 물소 한 마리 사막을 그리워하고 있다. photo by Neo Keitaro Ernie Graham - Belfast 데리고 온다 - 체치엔우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소다 느슨한 세 마리 물소이다 한 마리는 좌익이고 한 마리는 우익이고 한가운데 한 마리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물소는 미쳐 날뛰기 쉽다 곧잘 사람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사막으로 데리고 가려 한다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물소 코를 꿴 고삐를 단단히 잡고 있는 사람 배 불러 자고 싶어하는 물소 사상을 들판에 흘리고 온 물소 진작에..

놀자, 책이랑 2008.09.22

저, 가을

가을 - 이재무 검붉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이참에 아예 뿌리를 뽑겠다는 듯 들어올려진 생활에 거듭 삽날 들이대며 농성중인 가을 나는 저 분노한 가을이 쳐놓은 추억의 바리케이드 뚫고 나갈 재간이 없다 떠난 것들 힌꺼번에 몰려와 멱살 잡고 흔들 때마다 마음의 방에 가득 쏟아져내리는 검은 기억의 퇴적층 잦은 구토로 링거 꽂은 팔처럼 파랗게 여위어가는 영혼 아아, 누가 저 오래 굶주린 사나운 짐승의 고삐를 쥐어다오 * 이재무 시인다운 황량한 가을이다. 여전히 시니컬하다. 사나운 짐승이 내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요즘이다. 난 내 발톱에 이미 상처를 입고 있다. 서툴게 허둥대다 일이 날 것 같다. 긴 굶주림때문인가. 비발디- 사계 중 가을

놀자, 책이랑 2008.09.15

가을의 소원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은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가을의 소원이란 것이 별 게 아니구나. 언뜻 생각했다. 그러다 찬찬히 읽어보니 그게 아니다. 적막의 포로가 될 시간이 없다. 실속없이 동동거리는 것을 보면 한심할 때가 많지 않은가. 궁금한 걸 없애라니... 아침 저녁 국제전화에 매달려 안부를 전하고 묻고, 그래야 안심 하는 소심증에 걸렸는걸. 이게 젤루 어렵다. 호기심을 없앤다는 건 초탈, 아니면 포기상태인데. 아무 이유 없이 걸을 수는 있다. 안 그래도 밤산책을 하고 있는데.... 건..

놀자, 책이랑 2008.09.01

장하다, 생명

밤새 촛불 밝히고 기다렸는데 10시가 다 되어서야 소식이 왔다. 진통이 길어 무통으로 정상분만했다고 한다. 친정엄마가 곁에 있어야 하는 시간에 그야말로 이역만리에서... 애만 타는 밤을 보냈다. 예정일 2주 당겨서 세상문을 열고 나온 새 생명, 이란 미국이름을 지었다고. 한국이름은 엄마가 지으라고.. 나는 착한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무조건, 무차별 사랑의 포탄을 쏟아부을 수 있을까.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한 생명을 온전히 감싸안을 수 있는 커다란 보자기를 펼치는 일이 아닌가. 흐믓한 미소만 지어야하는... 글쎄.. 태생적 덜렁끼에 속수무책의 환상은 우짜나... 어쨌건 지금은 감사, 또 감사다. Жанна Бичевская - Как по Божией гор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