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가을의 소원

칠부능선 2008. 9. 1. 09:44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은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가을의 소원이란 것이 별 게 아니구나. 언뜻 생각했다.

그러다 찬찬히 읽어보니 그게 아니다.

적막의 포로가 될 시간이 없다. 실속없이 동동거리는 것을 보면 한심할 때가 많지 않은가.

궁금한 걸 없애라니... 아침 저녁 국제전화에 매달려 안부를 전하고 묻고,

그래야 안심 하는 소심증에 걸렸는걸.

이게 젤루 어렵다. 호기심을 없앤다는 건 초탈, 아니면 포기상태인데.

아무 이유 없이 걸을 수는 있다. 안 그래도 밤산책을 하고 있는데....

건강을 위해서라는 구실만 떼어내면 가능하다.

나락 냄새라니, 나락에서 가을볕 냄새가 난단 말인가. 이건 가을 들판에 나가보면 되겠네.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그래, 더 이상 인연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잡다한 일도. 용량초과다 이미.

가끔 소낙비 흠씬 맞을 기회는 있다. 꾸물꾸물한 날 저녁 산책에 우산을 안 가져가는 것이다.

신경을 곧추세우면 가능하겠는데.

혼자 우는 것, 가끔 잘 한다.

울다가 임종하기는 싫은데...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건, 가벼워지라는 뜻인가.

초록은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예전에도. 앞으로도. 태생적으로 회색이나 갈색을 좋아했으니까.

뭔 동문서답이냐구.

가을의 초입에 가을의 소원을 걸어두니 널널하다.

이제 시작이니까.

 

 








Eric Andersen - Chinatown
[Memory of the Future],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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