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여럿이 혼자서 술, 여럿이 혼자서 노정숙 유리창에 ‘낮술, 혼술 환영’이란 문구가 붙어있다. 행사를 마치고 같은 방향으로 오던 셋이서 ‘한잔만’ 하며 들어간 술집이다. 혼자 창밖을 보고 앉을 수 있는 자리와 테이블이 대여섯 개로 아담하다. 정면에 오래된 LP판이 빽빽하게 줄 서있고 옛날식으로 .. 수필. 시 - 발표작 2017.02.23
젖은 속옷 젖은 속옷 노정숙 미끈한 정장에 샬랄라 실크머플러를 두르고 우아하게 우와, 꿈에서도 환한 미소를 매달고 지긋이 품위롭게 괜찮아 괜찮아, 좋아 좋아를 달고 산다. 젖은 속옷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가끔 딴 나라에나 가서 상처를 어깨걸고 결핍을 부풀리며 슬픔에 슬픔을 잇.. 수필. 시 - 발표작 2017.02.15
겨울 바이칼을 향해 겨울 바이칼을 향해 노정숙 땡땡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를 마차로 건너는 것이 꿈이었으나 늦가을에 훌쩍 떠났다. 지방의 조용한 기차역처럼 생긴 이르크츠크 공항, 국제선 역사가 참으로 조촐하다. 오래전 모스크바의 세르메체보 공항에서 느낀 살벌함은 줄었다. 동토를 실감하며 바로 .. 수필. 시 - 발표작 2017.01.04
부부 진혼곡 + 단평 (한상렬) 부부 진혼곡 노정숙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의 당부는 집에 계시는 ‘아버님께 잘 해주지 말라’는 것이다. 기본만 대충 해드리라고 한다. 나쁜 것은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권해도 소용이 없다. 한때 아버님의 실체 모르는 바람이 어머니께는 요지부동의 상처가 되었다... 수필. 시 - 발표작 2016.11.29
겨울 채비 노정숙의 <바람, 바람> 12 겨울 채비 지나온 길 위에 떨어진 흔적을 보네 때로는 꽃보라로 때때로 풋이파리로 이따금 가시를 흩뿌리며 겨우 섰네 몸체보다 깊은 뿌리를 위해 땀과 눈물과 열정을 쏟아 부었지. 벌 나비 새는 정겨운 벗 살가운 훈기로 속살을 오르게 하고 강풍과 폭설은 .. 수필. 시 - 발표작 2016.11.29
피어라, 오늘 노정숙의 <바람, 바람>11 피어라, 오늘 70년을 사는 솔개는 40살 쯤 되면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노쇠한 몸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반년에 걸쳐 새 몸을 만드는 것이다. 산 정상에 올라 바위에 낡은 부리를 쪼아서 빠지게 한다. 서서히 새 부리가 돋아나면 그 부리로 무.. 수필. 시 - 발표작 2016.08.18
폐허 폐 허 노정숙 노동자 출신 작가 이인휘가 몸을 관통해서 쓴 소설『폐허를 보다』, 다섯 편의 중 ․ 단편이 모두 한 맥으로 흐른다. 80년대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다. 인간 해방, 노동 해방의 뜻을 품고 많은 목숨을 던졌지만 이들의 피의 값은 터무니없.. 수필. 시 - 발표작 2016.08.12
육체 탐구 육체 탐구 노정숙 아무도 모른다 오른손잡이라서 골병들게 일한 건 오른손인데 왼손이 칭얼댄다. 어르고 달래주어도 흥흥거리더니 아예 비명을 질러댄다. 매일 하는 노동을 운동이라 우기는 오른손, 슬몃슬몃 거들기만 하는 왼손, 세상은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았다. 터널 내 병명이 ‘팔.. 수필. 시 - 발표작 2016.07.03
처사, 남명 처사, 남명 노정숙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선생님께서 자주 오르시던 지리산은 연두를 거두고 진진 초록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산길 군데군데 돌계단을 두어 걷기 좋은 둘레 길을 만들어서 연일 인파로 북적입니다. 지리산은 옆구리를 파헤쳤는데도 여전히 신령스러운 기운을 풍기고 있.. 수필. 시 - 발표작 2016.06.15
질주하는 여름 노정숙의 <바람, 바람> 질주하는 여름 비꽃 든다. 여린 몸 낱낱이 힘 모아 한여름 열기를 삭이고 정결한 결기를 품었다. 씻어 내리는 건 비의 본성 감탕밭에서도 맑은 것을 온몸으로 자아올린다. 오늘 내린 비가 어제 것을 씻는다. 거친 대지에 흠뻑 스미고 넘쳐흐른다. 물의 힘은 흐름.. 수필. 시 - 발표작 201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