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겨울 바이칼을 향해

칠부능선 2017. 1. 4. 18:48

겨울 바이칼을 향해

노정숙

 

 

땡땡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를 마차로 건너는 것이 꿈이었으나 늦가을에 훌쩍 떠났다.

지방의 조용한 기차역처럼 생긴 이르크츠크 공항, 국제선 역사가 참으로 조촐하다. 오래전 모스크바의 세르메체보 공항에서 느낀 살벌함은 줄었다.

동토를 실감하며 바로 가방에서 외투를 꺼내 입었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을 보니 마음까지 스산하다.

한밤중에 들어선 러시아의 전통가옥 통나무집은 썰렁하다. 난방이 안 된 이곳, 안내인은 작은 라디에이터에 전원을 꽂아주고 나간다.

러시아인의 덩치에 비해 1인용 침대는 아주 작다. 기역자로 나눠진 침대에 두꺼운 옷을 입고 양말도 신고 잤다.

얼굴에 찬 기운을 느껴 일찍 일어났다. 어릴 적 한옥에서 잘 때 윗목에 자리끼로 둔 물이 얼어 있던 생각이 난다.

추운 것 빼고는 온통 근사한 숙소는 전나무와 자작나무 숲속에 있다. 쨍한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든다.

현지 가이드로 나온 Y는 교환학생으로 올 여름에 열 팀을 안내하고 끝인 줄 알았는데 뒤늦게 우리가 왔단다. 지금 이곳에 한국여행객은 우리뿐이라고 한다.

Y는 선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어려운 한국말을 좀 잊어버렸다는 말이 귀엽기까지 하다.

바이칼 호수는 336개의 강이 모여 이루어진 큰 호수로 전 세계 인구가 40년 동안 마실 수 있는 양의 물이다. 호수라기보다 바다 같다.

이곳은 영하 40도에서 50cm가 얼면 바이칼 호수 위로 차가 다닌다. 그때는 호흡도 곤란하고 폐까지 얼어붙는 느낌이라고 한다.

아직 귓속의 털이 곤두선다는 표현이 실감나지는 않았다.

얼지 않은 바이칼 호수, 마차 대신 유람선을 탔다. 배에서 바라보는 시린 물빛과 맞닿은 하늘을 보니 세상의 경계가 지워지는 듯하다.

어디서나 조잘대는 아이들과 진한 스킨십을 하는 연인도 어여쁘기만 하다. 유람선 2층에는 칼바람과 함께 음악이 크게 나오는데 아래층은 적막강산이다.

적막 속에서 바이칼 호수에만 산다는 ‘오물’이라는 생선과 보드카를 마셨다. 오물은 청어 비슷하게 생겼는데 훈제로 비린내는 전혀 없고 먹을 만하다.

추위 때문인지 40도의 보드카가 취기보다는 몸을 덥히는 용도로 더 어울린다.

바이칼은 어떤 바람에도 일렁이지 않은 거인의 모습이다. 거대한 호수가 보드카보다 더한 취기를 전해준다. 슬렁슬렁 긴장이 풀리고 무장해제다.

러시아문학에 빠지면서 러시아의 모든 게 궁금했다. 깊은 침묵 속에 빠진 연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애달픈 심경이라 할까.

그는 여전히 늠름한데 나는 왜 슬퍼지는지…. 옛 러시아의 기개를 생각하며 마음이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다음 날은 하루 종일 환바이칼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르쿠츠크 기차역에서 출발해서 슬로지얀카까지 논스톱으로 가서 기차의 머리를 바꿔

바이칼 호수를 옆에 끼고 시속 20km로 달린다. 절벽 가까이에 철로를 내서 바이칼 호수를 가까이 볼 수 있다. 중간 중간 경치 좋은 곳에 기차가 서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서 30분 정도 구경을 한다. 유일하게 1시간 30분 머무는 곳이 빨라빈뉘다. 강과 호수와 터널과 마을이 액자 속 그림 같다.

이곳을 현지 여행사 사장은 생을 마감하고 싶은 곳으로 찍어놓았다고 한다. ‘사장 나이가 몇인데’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적하고 작은 마을, 우리나라의 시골 풍경과 닮았다. 연못 같은 물웅덩이에 하늘이 내려와 앉았다. 바이칼 호수가 앞에 있고, 마을 뒤쪽은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였다.

나는 이내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칼 호수가 유일하게 흘러드는 안가라 강 앞에 섰다. 바람은 머리를 흩날리는데 다리 난간에 자물통들이 풀리지 않게 촘촘히 얽혀있다.

이렇게 묶고 묶이는 게 사랑이 아닌데,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이 다리 이름이 ‘늙은 군인의 다리’라니 기막히다. 제식훈련을 하는 학생들을 봤다.

각을 세운 군대식 동작으로 사회주의를 상기시키지만 얼굴은 여릿여릿 웃음기 가득하다. 이들도 사랑을 하게 되면 이곳에 자물쇠를 잠그며 다짐을 하겠지.

다리 옆 광장에는 긴 외투를 어깨에 걸친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동상이 위엄을 풍기며 내려다보고 있다.

군인이자 정치가로 승승장구했던 콜차크 제독, 그는 볼셰비키에게 처형당해 안가라 강에 던져졌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합이 붕괴하자 다시 애국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두 가지 가정을 해 본다. 개혁을 꿈꾼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성공했더라면, 적백내전에서 백군인 콜차크가 이겼더라면, 아니 배신당하지 않았더라면….

역사의 격랑 속에 인간은 얼마나 작은가, 그 도저한 흐름의 여울목에 열렬하게 살다 간 사람들을 떠올린다. 덧없는 생각을 하면서 자작나무 숲을 한껏 걸었다.

이곳은 조장鳥葬의 풍습이 있다. 시신을 새들이 먹기 좋게 나무 높이 올려놓은 흔적을 보았다. 나무가 많으니 무덤도 사우나 통처럼 나무로 만들었다.

인간의 마지막 집으로 제법 호사스럽다. 자작나무 옆구리에서 차가버섯이 자라고 있다. 소멸과 생성이 한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 낫겠다고 따라나선 남편은 바이칼호수가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라고 한다.

지난여름 살인적인 더위처럼 이번 겨울에 광포한 추위가 온다고 해도 그곳의 영하 40도를 생각하면 잘 이겨낼 것 같다. 다시 찾게 될 겨울 바이칼을 위하여.

 

 <그린에세이>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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