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폐허

칠부능선 2016. 8. 12. 21:48

 

 

폐 허

노정숙

 

 

노동자 출신 작가 이인휘가 몸을 관통해서 쓴 소설『폐허를 보다』, 다섯 편의 중 ․ 단편이 모두 한 맥으로 흐른다.

80년대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다. 인간 해방, 노동 해방의 뜻을 품고 많은 목숨을 던졌지만

이들의 피의 값은 터무니없이 헐하기만 했다.

어두운 시대를 살다 간 억울한 영혼들에 대한 진혼곡이 들린다.

『폐허를 보다』는 내게 소설小說 아니다. 소설詔說이며 소설訴說이다.

 

「알 수 없어요」

주인공인 작가는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고 만해마을 창작실에 들어갔는데, 만해의 환영을 만난다.

만해가 굶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생각한다. 우리의 비정과 무관심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엄혹한 메시지.

 

'선택이었겠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대한, 꺾을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문득 죽음도 선택할 수 있다는 당연한 생의 이치를 새롭게 깨달은 것처럼 이용석의 모습이 떠올랐 다.

그도 우리 사회가 죽인 것이리라.

문득 이용석의 고향 상태도가 떠올랐습니다. … 날개 달린 물 고기를 타고 상태도로 날아갔습니다.

해와 바람이 놀다가 어두워지면 별이

 떠올라 드넓은 지붕처럼 펼쳐지는 그곳에서 그의 영혼을 찾아 나섰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살진 사람들은 절대로 술을 많이 못 마시지요.

고은, 신경림 선생 같은 분들 보세요.  그분들은 배가 없어요. 비쩍 말랐는데도 젊은 사람들보다 술이 쎕니 다."

 

 

「공장의 불빛」

근사한 케릭터의 남자 사람이 몇 등장한다. 냉소적이고 시크한 표정이 살아있다.

그들의 어눌한 인사도, 호의도 소음에 흡수되어버린다. 사장의 교묘한 술수로 일터에서 쫓겨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늙은 기술자가 있다.

공장의 불빛은 끝내 참담하다. 어떤 시점으로 봐도 진저리쳐진다.

 

그는 정문 앞 들판에 서서 팔짱을 끼고 현장을 뚫어지게 노려봤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나가 인사 를 했지만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휘저어놓아도 상관하지 않 았고, 사장이 나와 쳐다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쁘게 빛나는 불빛

공장의 불빛

온 데 간 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이대론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긴 또 다른 고향

 

여윈 살 속으로 겨울바람이 파고들어 가물거리는 눈을 틔웁니다. 공장의 불빛이 싫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어느새 어두운 강물 위로 별들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별들이 총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시인, 강이산」

시인이란 현실에 맞지 않는 종족이었던가. 어느 정도 환상에서 놀아야 하는 어리삥삥한 부류,

강해져야하는 극한 상황에서는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자신의 상처와 타인의 아픔과 울분을 힘으로 만들지 못하는 지진아가 시인인가.

먼저 간 박영근 시인의 애도가 담겨있다.

 

『저 꽃이 불편하다』라는 시집을 내놓고 반년 넘게 시를 발표하지 않기에 술을 잠시 멈추고 시 를 쓰기를 바랐습니다.

시의 바다를 떠다니고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가 오래전 살았다는 방은 가리봉동 오거리 벌통집입니다.

그곳은 나와도 관계가 있고, 깊은 회한과 슬픔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잎도 꽃도 남김없이 지워버린 뒤

  눈도 그쳐 허름한

  늙은 산

  나무들 이름도 꽃 모양도 잊어버린 산

 

  그 산길 외진 바위 곁 잔설 위에서

  얼어가는 깃털 하나를 보았다

 

  아, 새였던가

 

 

「그 여자의 세상」

점박이, 그 여자가 살아내 모진 세상,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착취당하고 술집을 전전하다가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려는 즈음 병사病死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 여자, 마지막까지 그녀는 그녀의 방식으로

잘 살아냈다.

어설픈 눈물은 그녀에게 모독이다.

 

쓰레기처럼 살아서라도 아이에게 꽃의 향기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홍녀의 바람은 아이가 여섯 살이 되기도 전에 사러져버렸다.

말이 또랑또랑해진 아이가 늦가을 어느 날, 그녀를 빤히 쳐다보 며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엄마, 화냥년이 뭐야?"

 

날이 추워지면서 강물은 더 푸르러졌다. 산속의 나무들도 헐벗은 몸을 차갑게 드러내며 얼어붙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부유면 하늘 위를 맴돌던 길 잃은 흰 새 한 마리가 그 산으로 날아가 자 취를 감춰버렸다.

 

 

「페허를 보다」

공장에서 가장 높은 곳 굴뚝을 보면서 나는 베드로 광장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오벨리스크를 떠올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굴뚝 끝에 십자 모양의 피뢰침이 있을 것이다. 구원이 높은 곳에만 있을까.

 

심연처럼 깊이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굴뚝 위로 올라가고 있다.

키가 작고 바짝 마른 몸은 물기 잃은 풀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굴뚝에 박힌 디딤쇠를 한 칸 한 칸 올라설 때마다 그녀 의 단발머리가 어깨 위에서 출렁거린다.

… 티끌 같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어 굴뚝에 올라왔지만 황폐해져버린 인간의 삶이 눈에 가득했다.

정희는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신기루처럼 장벽 은 사라지고 광활한 초원이 울타리 밖으로 드넓게 펼쳐졌다.

눈부신 햇살, 드높은 하늘, 나무와 숲이 생명의 기운을 피워 올렸다. 온갖 생명체들이 자유롭게 뛰고 날아다니며 평화로웠다.

하지만 울타리 안 사람들은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울타리 안에 있다 고 믿으면서

기를 쓰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자본의 세상에 태어나 자본이 가르쳐준 것만 보다가 자본이 만들어 준 수의를 입고 죽는구나'

 

가슴을 에면서 울지 않고 읽은 나를 대견해 한다. 눈물과 분노를 힘으로 만들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억울함 없는 세상, 폭력 없는 세상, 인재人災 없는 세상을 그리는 건 허상일까. 다만 바라는 건 공정한 분배다.

제발 안녕하시길.

 

 

 

- 성남문화예술비평지『창』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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