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육체 탐구

칠부능선 2016. 7. 3. 00:30

 

육체 탐구

노정숙

                                                                                                                                       

 

아무도 모른다

오른손잡이라서 골병들게 일한 건 오른손인데 왼손이 칭얼댄다. 어르고 달래주어도 흥흥거리더니 아예 비명을 질러댄다.

매일 하는 노동을 운동이라 우기는 오른손, 슬몃슬몃 거들기만 하는 왼손, 세상은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았다.

 

 

터널

내 병명이 ‘팔목터널증후군’이란다. 손을 반복해서 쓰다 보니 팔목터널이 좁아지고 신경이 압박되어 나타나는 이상증세라고 한다.

컴퓨터의 키보드나 마우스를 과도하게 사용한 탓이다. 명문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손만 혹사시켰나보다.

손을 쉬게 해야 터널 끝 환한 세상이 나온다는데, 손을 쉬게 해서 생길 내 마음 속 터널은 또 어찌 하나.

 

 

오래된 부부

전화가 오면 멀리 나가는 남편, 내가 몰라야 하는 통화 내용이 무엇일까. 내 잔소리 버릇 때문이라는데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다시 잔소리할 의욕도 없으니 다행이다.

저무는 계절에 다시 신세계가 열리려나.

 

 

밤 산책

탄천을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만날 걷던 길을 걷는다,

이것이 무의식인줄 알았는데 비합리적인 정신의 힘이 무의식이라고 한다. 그래, 다음엔 합리적인 정신을 깨워 새로운 길을 걸어야겠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 밤, 꽃들은 아직 움츠리고 있지만 난 마음을 열어젖혔다.

교회 십자가를 보며 성호를 긋는 남자를 생각했다. 죄 짓지 말자, 아니 죄를 가벼이 여기는 은총을 주십사 빌자. 이제 시작이다, 널널한 봄.

 

 

계산

장례식장에 갔다. 그의 어머니는 의식 없이 코에 호스를 끼고 3년 6개월을 더 살다 가셨다.

마지막 순간에 판단을 잘못해서 누워계신 어머니도 보는 가족도 힘들었음을 고백한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인공 연명은 못할 짓이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썼다. 내 몸이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없을 때, 인공적인 처치를 하지 말라는 당부를 꾹꾹 눌러썼다.

오래 전, 대학병원에 시신 기증도 했다. 공짜로 주신 것을 다 쓰고 선심까지 쓴다. 아주 수지맞는 계산이다.

 

 

  실험수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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