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 19

결국, 이를 뽑다

무단히 한쪽 이가 떨어져나갔다. 그 자리가 매끈하여 통증도 없다. 그래도 치과에 갔더니 신경치료를 하고 크라운을 씌우기로 했다. 신경치료 4번 만에 실패하고 결국 발치하고 바로 인플란트 나사기둥을 박았다. 이런... 오래 전 이 치과에서 첫 인플란트를 했는데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기억만 있다. 그런데 .... 아, 공포스러웠다. 마취주사를 맞는 순간 아프고, 그 후 통증 없이 짐작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무서웠다. 그 중에 의사가 간호사한테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흐믓했다. 젊은 의사가 간호사들한테 깍듯한 존댓말을 하는 게. 당연한 이 모습에 내 맘이 좀 안정이 되었다. 한 달 넘게 신경 치료한 걸 불평할 수도 있지만 의사의 성의로 생각해야 맘이 편하다. 뭐든 내 손으로 할 수 없는 건 순응해야 한다. 어..

나를 부르는 숲 / 빌 브라이슨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 작가" 큭큭 웃음을 자아내게 하던 빌브라이슨, 여전하다. 에팔레치아 트레일은 장거리 등반이다. 미국 동부 해안을 따라 조지아주에서 메인 주까지 14개주를 관통하는 대 장정이다. 3,520킬로미터 중에 1,392킬로미터를 친구와 함께 걸은 기록이다. 떠나기 전에 안내책자들을 읽으며 상상하는 것을 시작으로 우여곡절과 좌충우돌 중에도 곳곳에 폭소가 장전되어있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독특한 여행을 숨죽이며 따랐다. 상상할 수 없는 잔잔한 스펙타클이다. 함께 간 친구 카츠도 특이한 케릭터다. 결국 친구를 잃어버리고, 길을 잃어버린 후 다시 만나 한 마음으로 종주를 포기한다. 첫 장에 이 책에 쏟아진 찬사들이 다섯 페이지가 이어진다. 뒷표지에 몇 줄로 감당이 안 되는 거다. 그..

놀자, 책이랑 2021.07.14

무허가 / 김계수

무허가 김계수 버스 정류장 25시 편의점 앞 함양댁 식당이 헐리고 있다 함양댁 허리둘레 같은 무허가 기둥이 헐린다 김씨가 내일 새벽 공사판 일만 있었더라면 박씨가 한 병 더 마시자는 김씨의 부탁을 들어주었더라면, 길 잃은 고양이가 김씨에게 늦은 저녁을 구걸하지 않았더라면, 소주병을 비울 때마다 높아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좁다란 평상이 평평하게 잡아주었더라면, 함양집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더러 사람의 품과 품에도 함부로 낯선 정이 드는 법인데 이까짓 무허가가 무슨 대죄냐고 땅을 두르리며 함양댁이 말했다

시 - 필사 2021.07.09

길을 내다 / 김계수

길을 내다 김계수 밭둑 드나드는 자리 키 넘어 자라 달아오는 살딸기나무 오가는 나를 염려하여 길 쪽으로 뻗은 가지 서넛 잘라내었다 붉어지기 전 살 올라 두툼한 노랑, 다음 날 다시 밭을 오르니 잎과 가지는 쪼그라져 말라가고 내 염려를 벗어났던 노란 열매가 잘렸던 가지에서 익어가고 있다, 빨갛게 그 잘린 가지와 잎에서 밤새 끌어모았을 수고로 기어코 붉게 영그는 나에게는 그저 웃자란 가시였을 저것이 가만히 붉게 살아가고 있다 그 마른 가지 옆으로 다시 길을 내었다 시집에서

시 - 필사 2021.07.09

ㅅ / 윤은영

ㅅ 윤은영 어릴 적 나는 늘 나무를 거꾸로 뒤집어놓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늘과 땅이 뒤집히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서기는 반에서 글시를 제일 잘 쓰는 아이 서기는 나만 할 수 있는 나에게만 뜨거운 직책 서기는 꼭 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단단한 뜻을 가진 동사의 명사형 나는 서기에 임명되어야만 했다 위독했던 할머니를 뒤로하고 개학 전날 서기가 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할머니는 개학날 돌아가셨고 나는 서기를 포기하기 싫어 장례식을 포기했다 과연 나는 나쁜 사람일까 서기가 되면 매일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의 눈길을 받을 수 있어 도망간 엄마 나를 내팽개친 아빠를 잊을 수 있어 학교는 기쁨 학교는 늘 서 있는 곳 꿈에서 내 심장을 갈라 보았다 시옷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새겨놓은 것인지 태어날 때부터 새..

시 - 필사 2021.07.09

폭력의 위상학 / 한병철

폭력에 무슨 위상이 있단 말인가. 아니, 폭력에 위상을 입혀? 어쨌거나 을 잡았다. 전작과 이어지는 생각들이 조금 더 세밀하게 펼쳐진다. 한병철이 성과사회라고 부르는 오늘의 사회에 폭력은 비로소 타자에서 오는 것이 아닌, 긍정성의 폭력으로 진화한다. 자기 자신을 다그치는 폭력,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긍정성의 과잉에서 나온 욕망도 폭력이라는 거다. * 과거 어느 때도 오늘날만큼 삶이 덧없지는 않았다. 이제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재의 결핍 앞에 직면한 인간은 신경과민에 빠진다. 과다행동과 결핍 앞에 직면한 인간은 신경과민에 빠진다. 과다행동과 삶의 가속화는 죽음을 예고하는 저 공허를 보상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생존의 히스테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살 줄도 죽을 줄도 모르는 산송장들의 ..

놀자, 책이랑 2021.07.07

공명의 집 - 단합회

인제, '공명의 집' 쥔장이신 허순애 선생님이 선정위원들을 초대했다. 며칠 전에 받은 허 선생의 책을 밤새 다 읽었다. 맹난자 선생님의 제자로 18년 만에 낸 첫 책이다. 54년생으로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어마무지한 경험을 한 분이다. 짐작할 수 조차 없는 세계부동산협회 부회장이라는 직함이 놀랍고, 지금도 피지에 모텔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오카리나를 7년 동안 배우며 불고 있고, 컬러에널리스트다. 다양한 경력과 경험의 소유자다. 기대와 설렘으로 아침을 맞고 9시 잠실역에서 조대표와 일행과 만났다. 이 책을 읽으며 켄 윌버의 가 떠올랐다. 표4에 맹난자 선생님의 글을 보니 확실해졌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자아탐구가 이어진다. 춘천 삼교리동치미막국수집에서 점심을 먹고, 백담사를 향..

위로

나로 인해 확진자가 되어 병원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나온 두 사람에게 꽃을 보냈다. 장미를 받아보니 기분 좋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일주일도 안 되어 폐기처분하게 되었다. 그래서 화분으로. 꽃을 바라보며 기분이 좋아지는 시간을 조금 길게 맞으면 좋겠다. 잃은 것 안에서 얻은 것을 찾은 시간이 되었기를. 오랜 지병인 편두통과 최근에 생긴 허리 통증이 완전 없어졌다는 내 중딩 친구는 코로나에 감사한단다. 수필 동지, 호은님은 고생하고 겁먹은 느낌, 다행히 가족들이 모두 음성인 것에 감사한단다. 나는 과일 한 바구니로 또 위로를 받았다. 문우 권선생에게

그냥 나무 하나 / 조현석

그냥 나무 하나 조현석 그냥 나무 하나 유심히 바라본다 그냥 나무 하나 새들이 떠난 빈 둥지 바라본다 그냥 나무 하나 고개 꺾어 꼭대기쯤 바라본다 그냥 나무 하나 끄트머리 없는 구름 한 점 없는 창공 바라본다 양쪽으로 끝없이 늘어서 메타세쿼이아 중 가장 높아 우뚝한 그냥 나무 하나 곁에 두고 왼쪽으로 돌아본다 그냥 나무 하나 곁에 두고 오른쪽으로 돌아본다 그냥 나무 하나 끝자리 저무는 하늘을 바라본다 그냥 나무 하나 뒤덮는 어둠 뒤집어쓰고 앉아본다

시 - 필사 2021.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