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600

감탄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아들이 '재미있다'며 두고 간 책이다. 끝부분에 95세인 사람이 썼다는 인용시를 아빠한테 읽어주기까지 하면서. 이런 간 큰 제목을 단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김정운이다. 약간 고수머리에 교복같은 옷을 입은, 좀 작은 키에 구엽게 생긴 사람이다. 절반은 들었던 이야기지만, 연신 피식거리게 만들었다. 인용이 틀린 부분도 있지만, 단숨에 읽혀지는 재미는 있다. 챕터 사이에 사진도 그럴듯하다. 독일에서 찍은 건데 시선이 좋다. '감탄은 인간만의 욕구다. 식욕, 성욕은 인간의 욕구가 아니다. 개나 소나 가지고 있는 동물적 욕구다. - 아기는 "엄마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지금 딱 꽂히는 대목이다. 어찌 아기들만 감탄을 먹고 자라는가. 인간은 모두 감탄을 원한다. 좀 큰 사람들 ..

놀자, 책이랑 2009.12.07

히말라야의 아들

- 이따금 흙에 삽질을 해 주어야 흙이 힘을 발휘한다. 내 뇌에도 삽질이 되었다. - 시간만이 사랑의 적이라는 것이 사실일까? 시간만이 정념과 고통을 이길 수 있다고? 사랑은 고요한 민물 속에서는 살아 남지 못하며, 파도치는 바다에서 살아간다. 폭풍우는 사랑의 가장 좋은 친구다. 사랑이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피눈물을 흘리게 해야한다. 사랑은 그 값으로만 지속된다. 자기자신을 걸고 지불할 줄 알아야 하며, 깨어서 흘러 지나가는 시간의 소리를 듣고, 시간을 재빨리 움켜쥘 줄 알아야 한다. - 달 삼키기 기다림은 중요한 역할, 달을 삼키기 위해서는 달에게 최면을 걸어야 한다. - 여자들은 달을 닮아서 자주 변하고, 변덕스럽다. -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믿지 않으면, 그 일은 아무런 즐거움도 가져다 ..

놀자, 책이랑 2009.09.07

백년학생

'인간은 누구나 백년학생입니다. 글쓰기에 뜻을 둔 이라면 천년습작을 각오해야겠지요. 좋은 글 한 편 품고 문 두르릴 그날까지 맛난 술 익히며 기다리겠습니다.' - 김탁환의 서문 중에서 * 백년학생이라는 말도 맘에 들고, 천년습작이라는 말도 위로가 된다. 유난히 풀리지 않는 글이 있다. 되돌아 보면, 솔직 담박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그러나 솔직히 솔직하게 쓸 수 없는 이 비애를... 노년의 삶에 대해 이라는 제목을 정하고 나니 진실로, 진실되게 쓸 수 없는 벽에 부딪쳤다. 그러니 얽히고 설킨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에고..... 속시끄러운 시간에 음악이 위로가 되려나.. Fuxan Os Ventos - Companeira

놀자, 책이랑 2009.08.13

글쓰기

글쓰기 - 정현종 뭘 하느냐구요? 빛을 만들고 있어요. 어두워서, 자칫하면 어두워지니까. 나의 안팎 자칫하면 어두워지니까. '시가 있는 아침'에서 건졌다. 히야~ 내 안팎을 밝히기 위해 끄적거리고 있었던 거구나. 그런데 나는 과연 빛을 만들 수 있을까. 자칫하면 자기 연민이나 자아 도취에 빠지기 쉽지. 자칫하면 자기 기만도 가까이 있지. 자칫하면 어둠과 몸섞기도 하지. 그러거나 말거나 자칫하면 배짱만 늘지.

놀자, 책이랑 2009.06.30

똥 - 배상환 아빠가 똥을 피하여 가는 것은 무서워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해도 막내는 자꾸 똥을 치우고 가자고 조른다 읽으며 씨익 웃었는데, 뒷통수가 당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렇듯 자기합리화에 능해지고 게을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 시외삼촌이 오셨다. 어머니의 막내 동생이다. 눈 밑 주름 수술을 해야하는데 좋은 병원을 소개해 달란다. 그리고 우리집에 와서 어른들과 함께 누워있겠다고. 위험한 수술이 아니니 아무 병원이나 가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냥 웃었다. 한참 있다가 우리집에 오셨다. 이모들과 이모부와 함께. 수술하고 반창고 붙인 상태로. 내가 오라고 안해서 그냥 가까운 곳에서 수술을 했다고. 에고........ 좀 찔린다. 예전엔 좀 더 착했던 것 같은데. 내가 힘들..

놀자, 책이랑 2009.06.29

그림움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김홍도가 물었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르지요.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산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윤복이 답하였다. -소설 《바람의 화원》중에서 * 언제부터인가 '그리움' 이란 말이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 속에 품은 아련함이나, 촉촉함이 사라져버리고 건조함만 남은 의례적인 단어가 되었다. 내게 그리움에 믿음이 흐려졌다. 그냥 달려가, 혹은 그냥 달려와 부딪쳐야 하는 것. 그리하여 흠뻑 젖을 것. 자신의 그림을 이라 한 화가가 생각난다. Ian Mattews - Little Known

놀자, 책이랑 2009.04.24

〈점선뎐〉

* 자신의 전기에 이런 제목을 달아야 장엄한 죽음이 될 것 같다나. 의사가 난소암이라고 하니까, 당뇨는요, 하고 물어봤단다. 그건 없다니까, 아, 다행이다. 난소, 그건 옵션이야, 그건 없어도 사람으로 아무 지장이 없지.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이 위나, 장, 간, 폐 뭐 이런거잖아. 아쉬움, 그런거 없단다. 내 몸이 아프니까 사람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더란다. 아들을 생각해서 힘내라는데 그것마저도 귀찮더라고, 왜 그런걸 들이대냐고. 그래도 80까진 살지 않겠어, 그의 예상이 빗나갔다. 3월 22일, 그는 63세에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치열한 예술가로, 자유인으로 살다가. 내가 70까지 잡았던 괜찮은 나이가 63세라도 괜찮겠다 싶다. 63세라면 몇 년 안 남았으니 정말로 치열하게, 그의 말처럼 악독하게 뭔가를..

놀자, 책이랑 2009.03.29

어니 그레엄

* 살짝 남은 여름의 끝자락 한낮 볕은 뜨겁게 과실을 익히고 잔잔 바람은 머리카락을 날리는데 왜 이리 마음은 수선한지. 여기, 좌익도 우익도 아닌 물소 한 마리 사막을 그리워하고 있다. photo by Neo Keitaro Ernie Graham - Belfast 데리고 온다 - 체치엔우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소다 느슨한 세 마리 물소이다 한 마리는 좌익이고 한 마리는 우익이고 한가운데 한 마리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물소는 미쳐 날뛰기 쉽다 곧잘 사람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사막으로 데리고 가려 한다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물소 코를 꿴 고삐를 단단히 잡고 있는 사람 배 불러 자고 싶어하는 물소 사상을 들판에 흘리고 온 물소 진작에..

놀자, 책이랑 2008.09.22

저, 가을

가을 - 이재무 검붉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이참에 아예 뿌리를 뽑겠다는 듯 들어올려진 생활에 거듭 삽날 들이대며 농성중인 가을 나는 저 분노한 가을이 쳐놓은 추억의 바리케이드 뚫고 나갈 재간이 없다 떠난 것들 힌꺼번에 몰려와 멱살 잡고 흔들 때마다 마음의 방에 가득 쏟아져내리는 검은 기억의 퇴적층 잦은 구토로 링거 꽂은 팔처럼 파랗게 여위어가는 영혼 아아, 누가 저 오래 굶주린 사나운 짐승의 고삐를 쥐어다오 * 이재무 시인다운 황량한 가을이다. 여전히 시니컬하다. 사나운 짐승이 내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요즘이다. 난 내 발톱에 이미 상처를 입고 있다. 서툴게 허둥대다 일이 날 것 같다. 긴 굶주림때문인가. 비발디- 사계 중 가을

놀자, 책이랑 2008.09.15

가을의 소원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은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가을의 소원이란 것이 별 게 아니구나. 언뜻 생각했다. 그러다 찬찬히 읽어보니 그게 아니다. 적막의 포로가 될 시간이 없다. 실속없이 동동거리는 것을 보면 한심할 때가 많지 않은가. 궁금한 걸 없애라니... 아침 저녁 국제전화에 매달려 안부를 전하고 묻고, 그래야 안심 하는 소심증에 걸렸는걸. 이게 젤루 어렵다. 호기심을 없앤다는 건 초탈, 아니면 포기상태인데. 아무 이유 없이 걸을 수는 있다. 안 그래도 밤산책을 하고 있는데.... 건..

놀자, 책이랑 2008.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