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점선뎐〉

칠부능선 2009. 3. 29. 21:41

 

 

<<점선뎐>>

자신의 전기에 이런 제목을 달아야 장엄한 죽음이 될 것 같다나.

의사가 난소암이라고 하니까, 당뇨는요, 하고 물어봤단다.

그건 없다니까, 아, 다행이다.

난소, 그건 옵션이야, 그건 없어도 사람으로 아무 지장이 없지.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이 위나, 장, 간, 폐 뭐 이런거잖아.

 

아쉬움, 그런거 없단다.

내 몸이 아프니까 사람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더란다.

아들을 생각해서 힘내라는데 그것마저도 귀찮더라고, 왜 그런걸 들이대냐고.

그래도 80까진 살지 않겠어,

 

그의 예상이 빗나갔다.

3월 22일, 그는 63세에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치열한 예술가로, 자유인으로 살다가.

 

내가 70까지 잡았던 괜찮은 나이가 63세라도 괜찮겠다 싶다.

63세라면 몇 년 안 남았으니 정말로 치열하게, 그의 말처럼 악독하게 뭔가를 해야할 것도 같고...

 

  

“암은 병균이 감염된 게 아니다. 내 몸속에서 스스로 돋아난 종유석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암조차도 사랑한다. 내 삶의 궤적인 것이다. (중략)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도 없는 사람들을 나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암이 발생한 것은 죽기 전에 생각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 <<점선뎐>> 중에서

 


사춘기를 거치면서 여러 나라 시인들이 쓴 시를 읽고 그들의 생애를 알게 됐다.

수많은 시인들이 후대가 없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언제부턴가, 명절날 차례를 지낼때면 그들이 문득 생각난다.

죽은 시인들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아르튀르 랭보가 제일 불쌍했다.

그러던 어느해, 아버지 몰래 불어와 한자가 섞인 지방을 썼다.

그렇게 몇번 차례를 지내고 나서는 붓으로 정성드려 써보기도 했다.

그 랭보의 지방을 식구들 몰래 차례상 뒷다리 안 보이는 곳에 붙였다.

'랭보씨 음식 먹는 시간입니다. 어서 드십시오.'

                                                                                 - <<점선뎐>> 중에서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이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뒤 병원에 입원했는데 서울 야경을 보더니 이러더라. '서울도 아름답네.' 그리고 말하는 기능이 없어졌고, 죽었어. 그 말이 유언이 된 거야.

때로 병이 도움이 되는 게 뭔지 아나?

거기에서 살아나오면 나머지들이 굉장히 후레쉬하게 선명해져.

여행보다 나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켤 수 있다는 쾌감, 작은 풀 한 포기의 기적을 일에 쫓기는 사람은 몰라.

병은 멋있는 거야. 병에 걸려봐야 아름다움을 알아.

그 전에는 허욕에 쫓겨. 큰 집, 큰 냉장고, 더 높은 곳에 시달리다가 병에 걸리면 살아온 게 별거 아니구나, 들의 잡초가 이렇게, 초록색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느껴."

 

 

"하루는 남편이 친구를 데려온다는 거야.

그래서 집에서 내가 직접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모두 잘랐어.

지금도 못났지만 더 못나게 만들어 마누라 자랑을 못하게 해야겠구나.

내가 아름답게 분칠하고 파티 가고 자랑하고 다니면 예술할 시간이 어디 있냐?

예술가는 절대고독이 필요해.

절체절명의 혼자 있는 시간! 결혼해서 예술하는 시간이 있겠냐? 악독해야 해.

악독하지 않으면 예술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그림을 10시간 그리려면 생각을 맑게 조용하게 한 뒤 그리고 싶어지면 그리는 거야.

일상적인 사교나 외교적인 생활은 다 포기해야 해.

김치를 가지고 날 만나러 오면 그 김치를 면상에 던져야 해.

김치를 핑계로 우리집에 못 오게. 방해받는 게 싫으니까.

외로워서 눈까리 팅팅 붓게 울어도 너거는 안 만난다고 생각해야 해."

     

                                                                                       - 인터뷰 기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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