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 / 정진규 삽 - 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 토록 입술에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 주 잘 드른 소리, 그러면서도 한두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 (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 시 - 필사 2008.07.27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고재종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고재종 저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샛노란 꽃을 밀어올리다니 네 오롯한 호흡 앞에서 이젠 나도 모르게 환해진다 거기 문득 네가 있음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 시 - 필사 2008.07.24
속수무책 * 암의 희생자들은 자동차의 저속기어 같은 사람들, 즉 좀처럼 감정을 분출하지 않아 고통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릴때부터 부모와 격리감을 갖고 있다. 암은 은유로서도 내면의 야만성이었다. - 수전 손택의 << 은유로서의 질병 >> 중에서 '화 내~ , 엄마한테 막 화 내~' .. 놀자, 사람이랑 2008.07.24
민감한 길 *언제부터인가 민감함에서 멀어지는 나를 느낀다. 둔감해지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아니 인정할 수 없었던 시간들을 건너와 이젠, 순하게 인정하는 지점에 다다랐다. 반짝이지 않지만 지긋이 바라보는 눈으로 족하다. 펄펄 끓지 않아도 따땃한 기운만으로 가슴을 기특하게 여긴다. 핑핑 돌지 않아도.. 놀자, 사람이랑 2008.07.22
술 마시는 사람 취해서 비틀거리며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는데 개 한 마리가 짖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때 내 혼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 3m 정도 저 앞에 떨어진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개가 왼쪽 다리를 무는 것을 보았다. 재미있게 느껴져서 내 몸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파? 아파?" . . 사람은 술에도 취하고, 차에.. 놀자, 책이랑 2008.07.20
장마 중 photo by Neo Keitaro Ernie Graham - Sebastian Ernie Graham - Belfast 데리고 온다 - 체치엔우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소다 느슨한 세 마리 물소이다 한 마리는 좌익이고 한 마리는 우익이고 한가운데 한 마리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물소는 미쳐 날뛰기 쉽다 곧잘 사람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사막으로 데리고 가려 한다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물소 코를 꿴 고삐를 단단히 잡고 있는 사람 배 불러 자고 싶어하는 물소 사상을 들판에 흘리고 온 물소 진작에 저항을 잊어버린 물소를 우리집 소의 울에 데리고 온다 내일의 평화를 갈기 위해 물소를 데리고 온다 놀자, 책이랑 2008.07.03
허물 / 이어령 허 물 - 이어령 몰래 보면 볼 수가 있다. 이른 아침에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슬내린 어두운 숲으로 가면 매미가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되는 것을 뱀이 허물을 벗고 뱀이 되는 것을 나무들이 허물을 벗고 나목이 되고 바위가 허물을 벗고 구름이 되고 강물이 허물을 벗고 비가 되는 것을 몰래 보면 볼 수.. 시 - 필사 2008.06.29
박영근 이후 / 안상학 박영근 이후 - 안상학 누구라도 이젠 밤늦게 전화해도 반갑게 받자고 차비 만 원 달래면 웃전까지 얹어 주자고 천 리고 만 리고 택시타고 달려오면 택시비에 술값까지 마련해서 버선발로 마중가자고 마음먹기도 전에 박찬 시인이 갔다. 그래, 이젠 정말 어느 누구라도 살아 있을 때 잘해 주자고 술 한 .. 시 - 필사 2008.06.29
수신거부 늘 듣고싶은 목소리에 수신거부를 걸었다. Ren&#233; Magritte Saurom Lamderth - La Dama de Lorien 연애의 단면(斷面) - 김기림 애인이여 당신이 나를 가지고 있다고 안심할 때 나는 당신의 밖에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의 속에 내가 있다고 하면 나는 한 덩어리 목탄에 불과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놓아 보내는 .. 놀자, 사람이랑 2008.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