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599

최소한의 선의 / 문유석

코로나19 시기에 새로 나온 문유석의 책이다. 그동안 23년 판사 생활을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기로 했단다. 헌법을 주제로 해서 그런지 그동안 읽은 그의 책 중에서 제일 잘 안 읽힌다. 그럼에도 출간 한 달도 안 되어 2쇄를 찍었다. 인기는 여전한거다. 아니, 실은 믿고 사는 저자다. 크게 재미없어도 여전한 그의 솔직함에 끌려 끝까지 읽어나간다. ​ ​ * 『맹자』 「공손추편」에 이르기를 "불쌍해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불쌍해하는 마음은 어짊의 근본"이라고 했다. ... ' 삶은 모두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 왕이 다른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으며,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가 있다. 그 마음으로 정치를 행하면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이듯 천하를 다르릴 수 있다.' 사람에게 해를..

놀자, 책이랑 2023.06.30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 파스칼 키냐르

오랜만에 확 끌린 책이다. 총알배송으로 받아서 바로 읽었는데...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해독 불가한 난해함에 부딪치는데 흥미로운 건 뭔지. 고급진 글쓰기 교본이다. 시작부터 어렵다는 옮긴이의 말을 건너뛰었는데 다시 읽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2000년 콩쿠르 수상작 『떠도는 그림자들』로 선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천 편의 소설과 맞먹는 한 권의 책을 썼다. 단락 하나 하나가 한 편의 잠재적 소설이다." 숨겨진 책 몇 권을 찾는 건 읽은 이의 능력이다. 나는 숨겨진 책을 찾기는커녕 이 책도 다 들이질 못했다. 거듭 거듭 읽어야 할 듯. ​ 프론토 -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황제의 스승인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1~2세기 로마의 문법학자, 수학자인 그는 파격적인 생각으로 당대에 ..

놀자, 책이랑 2023.06.24

평화 안에 머물러라 / 자크 필립

신부님과 하는 독서모임 두 번째 책을 친구가 줬다. 앗, 맛보기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거부할 수 없어 받아서 읽었다. 얇은 책에 너무도 지당하고 거룩한 말씀들이다. 다 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라 슬렁슬렁 넘겼다. 자꾸 반복되니 가슴이 울렁거린다. 한때 뜨겁던 마음을 떠올리기도 하며 순한 마음이 된다. 보시기 좋게 살지도 못하면서 왜 이리 마음이 든든해지는지... 나는 참으로 뻔뻔하다. ​ ​ * 내적 평화의 필요조건은 '선한 의지'다. ... 이러한 선의, 곧 큰일에나 작은 일에나 언제나 하느님께 '예'라고 말하려는 슴관적 결의는 내적 평화의 필수 조건이다. 이와 같은 결의를 굳게 지니지 못하는 한 우리는 불안하고 슬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35쪽) ​ * 십자가의 성 요한이 생에 말년에 죽..

놀자, 책이랑 2023.06.15

책이 입은 옷 / 줌파 라히리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쓴 두 번째 산문집이다. 표지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썼다. 옷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쓰이는 시대다. 책의 표지는 책의 옷이다. 옷을 벗어야 속살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메세지를 가지고 있다. 줌파 라히리는 표지가 없는 발가벗은 책을 그리워한다. 학생시절 도서관에서 읽었던 표지를 떼어 하드커버로 묶은 책들을. ​ ​ * 어렸을 때부터 입은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사실이 내겐 고통이었다. 내 이름, 내 가족, 내 외모가 이미 특별하다는 걸 의식했기에 나머지 면에서는 남들과 비슷하고 싶었다. 남들과 똑같기를, 아니 눈에 띄지 않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스타일을 선택해야 했고 규칙에서 벗어난 특별한 스타일 때문에 내가 옷을 못 입는다고 느꼈다. (15쪽)..

놀자, 책이랑 2023.05.23

루이와 젤리

시작부터 주눅 들게 신성하다. 루이와 젤리 부부는 생활의 모든 지향을 하느님 뜻에 두고 산다. 그런 삶의 응답인지 다섯 딸이 모두 성소를 받는다. 이 기꺼운 삶 안에도 고통이 있다. 어린 자녀를 넷이나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젤리는 병이 든다. 젤리의 투병 자세는 인간의 오감을 넘어서 거룩함에 이른다. 루이는 노년에 정신병원까지 가는 고통을 겪는다. 그 안에서 또 다른 뜻을 찾는 딸의 믿음, 이미 천상의 마음이다. '보시기 좋다' 하셨을 ... 내 맘대로, 그저 '믿는다'는 나를 너무도 부끄럽게 한다. ​ ​ ​ * 그전의 젤리의 기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조금은 자기중심적인 청을 드리는 기도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성모님처럼 '피앗(그애로 제게 이루어지소서)'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80..

놀자, 책이랑 2023.05.19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 줌파 라히리

줌파 라히리, 참 생소한 이름이다. 유발 하라리는 이제 입에 붙었는데... 처음은 다 그렇겠지. 익숙한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이탈리아어를 배워서 소설을 쓴다. 줌파 라히리의 첫 산문집이다. 첫 소설집으로 퓰리처상, 팬, 오헨리 문학상, 헤밍웨이 상을 탄 작가가 그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언어에 도전한 게 대단하다. 그의 도전의 변을 들어본다. 이 작은 책은 이탈리아어 사전이다. ​ ​ 이 간결한 목차가 맘에 든다. 영어에서 이탈리어어로 건너가는 과정에 사전을 끼고 살았다. 번개에 맞은 것처럼 전율을 느낀 이탈리아어 사랑이 시작되고 영어 세상에서 스스로 추방되고... 어느 날 부터 일기가 이탈리아어로 써지더니 소설이 써지는 것이다. ​ ​ * 사람들은 사랑에 빠졌을 때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한다. 지금 경..

놀자, 책이랑 2023.05.16

김탁환의 원고지 / 김탁환

오래 전 을 읽으면서부터 김탁환을 바라봤다. 그때는 명작을 통해 알게 된, 글쓰기가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그 생각은 너무도 한가로운 마음이었다. ​ ​ '추억에는 언제나 경련을 일으키는 세부사항이 있다.' - 아니 에르노의 말로 시작한다. ​ ' 『김탁환의 원고지』 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침묵으로 쓴 창작일기다. ... 내게 원고지란 글을 쓰고 싶은 첫마음과 동의어다. ... 소설을 끝내면 참고도서만 남는 줄 알았다. 호랑이처럼 홀로 떠도는 작가에게 창작일기란 날마다 몰래 치른 백병전의 흉터이자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쑥스러운 선물이리라.' 작가의 여는 글에 이어 연보가 나온다. ​ 이 맹렬한 창작의 결과물들을 바라보며 그저 입이 딱, 벌어진다. 발자크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노동자다. ​..

놀자, 책이랑 2023.05.07

바람의 말 / 최현숙

안동의 최현숙 선생님을 못 뵌지 수 년이 되었다. 만나지 않아도 가끔 생각나는 분이다.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느낌이 믿음직스러운, '난, 이런 사람이 좋다' 이런 주제로 글을 쓴다면 내 글에 등장할 1인이다. 오래 숙성하여, 무르익은 수필집이다. 수필집 한 권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인다. 짐작한 그대로라서 더 반갑다. 깊이 고개 숙이며 박수보낸다. 나날이 글을 품고, 기쁘시길 빈다. ​ ​ * 글을 만나면서 외로움 낯섦과도 친해졌습니다. 보이는 풍경 오가는 말 심지어 자동차 소음까지 글감으로 다가왔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글이 되는 과정이 좋았습니다. 부대끼는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고 소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눈도 갖게 되었습니다. 수필의 길에 들어선 보람입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 * 태..

놀자, 책이랑 2023.04.17

마릴린 먼로가 좋아 / 이찬옥

나는 소설을 수필로 읽는 버릇이 있다. 최근에 카뮈와 헤세를 읽으면서도 그들의 생애를 더듬는 걸 보니 습관이 되어버린 듯도 하다. 어이없게 '작가의 말'을 읽으며 두 편으로 나누면 좋을 수필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8편 단편소설이 그만큼 현실감 있게 읽힌다. 박수보낸다. ​ ​ * 수중에서 온종일 흐느적거리는 꼬리가 저려서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무도회장을 찾아갔다. 무도회장에서 그를 만났던 날, 그는 입구에서 수줍게 서 있던 나를 이끌고 사방이 거울로 된, 그래서 몇 배 더 넓어 보이는 무도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어지러웠다. 나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음악에 맞춰 얼굴을 마주 보며 손을 잡고 함께 스텝을 맞춘다는건 얼마나 은밀한 대화인가. (30쪽) ​ 아쿠아리스트 여자..

놀자, 책이랑 2023.04.08

공부론 / 김영민

새로운 교재를 탐색하느라 책 몇 권을 주문했다. 공부가 의무이던 때는 공부가 싫어서 딴짓을 많이 했는데, 이제사 공부가 좋아졌다. 지금 내 공부라는 건 그저 책 읽는 것이지만. 시험이 없으니 가볍고 즐겁다. ​ 인이불발引而不發, 당기되 쏘지 않는다니.... 김영민의 예사롭지 않은 생각을 따라가본다. 예스런 우리말이 반갑다. 검색을 해 봐야 하나? 그냥 느낌대로 일단 읽어나간다. 아무래도 되새김이 필요하다. ​ ​ * ... 자본의 힘과 기술의 마력 사이에서 몰풍스레 실그러져 버린 인문학 공부의 이치(人紋) 는 어디에 있을까요? .... 익으면 진리가 도망치듯, 도망치는 진리를 도망치는 대로 놓아두는 것! 그처럼 기다리되 기대하지 않고, 알되 묵히며, 하이얀 의욕으로 생생하지만 욕심은 없으니, 당기되 쏘지..

놀자, 책이랑 2023.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