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천년습작>을 읽으면서부터 김탁환을 바라봤다.
그때는 명작을 통해 알게 된, 글쓰기가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그 생각은 너무도 한가로운 마음이었다.
'추억에는 언제나 경련을 일으키는 세부사항이 있다.'
- 아니 에르노의 말로 시작한다.
' 『김탁환의 원고지』 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침묵으로 쓴 창작일기다. ... 내게 원고지란 글을 쓰고 싶은 첫마음과 동의어다. ... 소설을 끝내면 참고도서만 남는 줄 알았다. 호랑이처럼 홀로 떠도는 작가에게 창작일기란 날마다 몰래 치른 백병전의 흉터이자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쑥스러운 선물이리라.'
작가의 여는 글에 이어 연보가 나온다.
이 맹렬한 창작의 결과물들을 바라보며 그저 입이 딱, 벌어진다.
발자크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노동자다.
* 2000년 10월 16일 ---- 처음에는 전략을 선명하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다가, 이제는 그 전략마저 지워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의도하지 않고 가기. 그것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 끝없는 이야기 속에서 소설가가 지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이다. 끝나지 않으면 어때, 갈 데까지 가보는 거지. (22쪽)
* 황진이를 쓰면서 든 생각, 황진이에 대한 일화들은 숫자놀음이 많다. 소세양과는 한 달이란 기간을 정해놓고 줄타기를 하고, 이사종과의 동거 기간도 6년으로 못박고 있다. 남자들은 그 기간을 어기는 데 비해 황진이는 그 기간을 칼같이 지킨다는 이야기! 허나 그건 황진이의 진면목을 살피는 데 방해가 된다. 문제는 숫자놀음이 아니라 그 남자들을 대하는 황진이의 태도이니까.
....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황진이가 딱 6년을 채운 부분이 아니라, 그녀가 놀랍게도 그 당시에 벌써 계약결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합의에 의해 자기 주장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헤어졌다는 부분이다. 21세기에도 이런 여성을 만나기 힘들다. (56쪽)
* <황야의 이리>에서 헤세는 '유머'를 강조한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 세대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유머인지도 모른다. 진지한 것도 좋지만 가끔은 자신을 슬픔과 절망의 늪에서 건져낼 필요도 있다. ... 왜? 슬픔을 아는 자만이 유머의 가치를 이해하니까. 눈으로는 웃으면서 가슴으로 우는, 그런 상황 말이다. (74쪽)
* 5년 남짓 나를 사로잡은 작가는 발자크였다. 밤낮 없이 쓰고 또 쓰는 저돌성도 매력적이었지만, 나는 그의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치는 퇴고의 나날에 매료되었다. 완성된 책 대신에 교정부호가 가득 찬 교정쇄 제본을 벗들에게 선물하는 작가는 발자크뿐이리라. (76쪽)
* 새로운 스타일이 중요하다. 군더더기 없이 이야기 자체로 승부할 것, 그러면서도 아름다울 것, 왜 비평을 하다가 창작으로 전환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간단하다. 예술은 창작자의 것이므로. 우아한 달변을 뽐내는 손님보단 처절하게 버벅대는 주인이 좋다. (211쪽)
* 문득 헤밍웨이가 떠올랐다. 자살의 가족력이나 우울증 등을 논외로 치자면, 나는 헤밍웨이가 엽총을 턱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순간보다 죽기로 결심하고서도, 그 전날 책상 앞에 앉아서 마지막 원고를 쓰는 소설가의 지독한 일상이 슬프다. 이 거대한 단절, 죽음으로 덮어버리고 싶은 욕망까지 생기는 그 단절 뒤엔 무엇이 예술가를 기다리고 있을까. 예술가가 더 이상 예술을 하지 않을 때 그는 예술가일까. 무대에서 춤추지 않는 발레리나의 인생2막은 어떻게 시작되어야 할까. (329쪽)
* 승부는 퇴고를 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욕심을 품고, 그 욕심을 완성하기 위해 정말 성실하면서도 순발력 있게 움직여야 한다. 온몸의 감각이란 감각은 모두 총동원해서 단어를 만지고 문장과 사귀고 문단을 향해 윽박질러야 한다. (338쪽)
* 2010년 8월 6일 ---- 퇴고 중단! 8월 15일까지 쉬기로 했다. 컴퓨터 앞에 앉는 것만으로도 어깨와 목과 등이 아프다. 찔끔찔끔 퇴고하며 앓느니, 그냥 푸욱 쉬어보기로 한다. 15일이 되어도 낫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다. 이렇게 길게 어깨와 등이 아픈 적이 없었는데... . 오늘도 두 시간 동안 한의원에서 지냈다. 찜질하고, 침 맞고, 부황 뜨고, 추나 요법까지... 괜히 몸에게 미안했다.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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