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 참 생소한 이름이다. 유발 하라리는 이제 입에 붙었는데... 처음은 다 그렇겠지.
익숙한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이탈리아어를 배워서 소설을 쓴다. 줌파 라히리의 첫 산문집이다.
첫 소설집으로 퓰리처상, 팬, 오헨리 문학상, 헤밍웨이 상을 탄 작가가 그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언어에 도전한 게 대단하다. 그의 도전의 변을 들어본다.
이 작은 책은 이탈리아어 사전이다.
이 간결한 목차가 맘에 든다.
영어에서 이탈리어어로 건너가는 과정에 사전을 끼고 살았다.
번개에 맞은 것처럼 전율을 느낀 이탈리아어 사랑이 시작되고
영어 세상에서 스스로 추방되고...
어느 날 부터 일기가 이탈리아어로 써지더니 소설이 써지는 것이다.
* 사람들은 사랑에 빠졌을 때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한다. 지금 경험하는 흥분과 열정이 계속되기를 꿈꾼다. 이탈리아어로 읽는 건 내게 그런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죽으면 이탈리아어를 새록새록 알아가는 것도 끝나기 때문에 난 죽고 싶지 않다. (43쪽)
* 미국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뱅골어를 외국인 억양 없이 완벽하게 말하고자 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뭣보다 내가 완벽히 그분들의 딸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한편 난 미국인으로 온전히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내가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했음에도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뿌리를 박지 못하고 붕 떠 있었다. ...
여기 이탈리아에서 난 아주 잘 지내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불완전하다고 느낀다. ...
성인이고 작가인 내가 왜 불완전과의 이 새로운 관계에 매력을 느끼는 걸까?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든 걸까? 명확하게 이해가 될 때의 황홀감, 나 자신에 대한 보다 깊은 자각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불완전은 발명, 상상력, 창조성에 실마리를 준다. 자극한다. 내가 불완전하다고 느낄수록 난 더욱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94쪽)
* 난 이탈리아어 책을 한 꾸러미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가 그리웠지만 그 책들 덕분에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이 침묵의 시기, 언어적 고립의 시기에 책만이 날 안심시켜주었다. 책은 현실을 뛰어넘기에 가장 좋은 개인적이고 현명하고 믿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107쪽)
* 난 영어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영어 작가가 됐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유명해졌다.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데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아서 실수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명예로운 일이었지만 상을 받은 게 영 믿기지 않았다. 내 인생을 바꿔놓은 그런 찬사가 말이다. 상을 받은 이후 난 유명 작가로 인정받았다. 그 때문에 스스로도 이제 무명에 가까운 알려지지 않은 견습 작가로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다. 날 숨길 수 있는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내 모든 창작이 나왔다. 그런데 첫 책이 출간된 지 일 년 후 난 내 익명성을 잃어버렸다. (133쪽)
*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디킨슨의 시나 편지를 읽곤 했다. 내겐 하나의 의식이 됐다. 어느 날 이런 글을 찾아냈다. "무서운 심연의 언저리에서 항해하는 느낌이다. 심연을 피해 나갈 수 없고 위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내 약한 배가 미끄러져 들어갈까 두렵다." 번개를 맞은 느낌이었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정확히 그런 느낌이었다.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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