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 21

아롬다온 개조심 / 류창희

부산의 류창희 선생의 맹렬한 삶을 또 바라본다. 여리여리한 몸의 연유부터 열심으로 내딛는 마음까지 훤히 읽힌다. 형식을 벗고 자유롭지만 바닥에는 공자님 말씀이 깔려있다. 선생이 진행하는 '논어강의실' 풍경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벗음으로 스스로 치유되는 수필에 정점을 찍고, 바뀐 세속의 풍경과 속내를 보여준다. 글 너머의 의미를 생각하며 슬쩍 웃음이 지어지기도 하고 맘이 쓰리기도 하다. 동시대 동지역을 살아 낸 이야기에서는 곳곳의 추억에 함께 젖었다. 여행지도 같은 경로가 많은데, 그야말로 차별화되어 새롭게 읽었다. 부산문화재단에서 기금을 받아 만든 책이라니 더욱 반갑다. 부산 여행을 갔는데, 그곳 게스트하우스 잠자리에 누워 류 선생이 밤새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준 듯 하다. 요즘 내가 하는 설 인사..

놀자, 책이랑 2022.01.29

빠삐용

한달에 한 번 하는 합평모임인데 2년만에 모였다. 문학상 수상으로 첫 책을 낸 회장님을 위해 케잌에 불도 켜고, 그동안 암수술을 하고 아들 결혼도 시키고, 목디스크로 두 달을 누워있기도 하고, 시부모님과 이별도 하고 ...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2년이 흘렀으나 우리는 지난 주에 만난듯 금새 허심탄회해 진다. 점심인데도 6인이 와인 세 병을 비웠다. 취기를 느낀 사람은 없는 듯.... 이 팀은 한술한다. '노가리'를 거점으로 삼던 팀이니 펜데믹에 가장 타격이 컸다. 완전체가 되려면 2인이 더 있어야 한다. 다시 빠지지 말고, 삐지지 말고, 격한 비판에도 용기를 갖자는 이 모임의 시작을 생각한다. 브레이크 타임까지 있다가 야탑 비북스에 갔다. 비북스는 여전히 한가롭다. 쥔장과 책이야기를 좀 하고... 함께 야..

인도방랑 / 후지와라 신야

1944년 일본 후쿠오카 산産 후지와라 신야가 25세에 인도에서 3년간 머문 기록이다. 내가 처음 인도에 간 게 2006년이니까 한참의 시차가 있다. 그럼에도 사진으로 만난 그곳 사람들 얼굴은 그대로다. 이 책을 읽으니 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며 다녀왔지만 '관광'에 지나지 않았던 거다. 두 번째, 2013년 인문학기행으로 간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속살이란 것이 본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주 가까이서 바라본 풍경이 아득하면서도 찌릿하다. * 인도에 오래 있다 보면 점점 벌레처럼 되어갑니다. 인력이 강한 땅 같아요. 인력은 지구 위 어디나 똑같겠지만 땅이 끌어당기는 힘 같은 게 있어요. 땅의 힘 때문에 기진맥진해가는 느낌이 들지요. 그런데 티베트에 가면 하늘이 확 잡아당긴달지, 문득 ..

놀자, 책이랑 2022.01.26

닿고 싶은 곳 / 최문자

닿고 싶은 곳 최문자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시 - 필사 2022.01.25

역행 / 권영옥

역행 권영옥 한 화분에 베고니아 두 포기가 포개진 걸 사왔다 물 주고 영양제를 주어 둘은 밤마다 이슬 적시는 놀이에 빠진 줄 알았는데 시샘하고 밀어내어 한 포기가 명경을 포기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전생의 악연이 내외라는 말처럼 너희도 몸 속에 낯선 생각을 품고 이곳으로 왔구나 보이지 않게 뿌리와 뿌리가 자리다툼을 해서 한 꽃이 수렁 냄새를 풍긴다 몽글하던 외피가 겹겹 비늘에 싸여 서로에게 단맛이 되지 못하는 운명은 일찍 한 쪽을 저물게 한다 '겨울길'*에서 신부가 청년의 운명을 바꿔 한 청년이 파란 낙엽이 되고. 한 청년은 로맨스를 얻었다지, 풀밭을 얻었다지 가을 속에 서 있는 나는 잎 속에 담긴 빛을 모르고 눈앞의 그림자만 보인다 영혼의 발부리가 어둠에 닿은 탓이다 운명은 왜 한쪽으로만 편입되려 하는지 ..

시 - 필사 2022.01.25

미리 세배

섣달 그믐도 아니니 묵은세배라고 할 수도 없고, 지난주에 88세 큰어머니가 다치셨다고 해서 바로 다녀왔다. 오른쪽 다리 무릎 위까지 깁스를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세상사 모두 내 맘대로 안되는 것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않는다, 그때 운이 나빠서 이렇게 된 것이지 운전자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누군들 아프고 싶어 아프겠냐, 다치고 싶어 다치겠냐'고. 골목에서 차를 피하다 넘어져서 생긴일이라며 담담히 이야기하신다. 대화 중간중간 노래를 흥얼거리신다. 초긍정적인 성격은 그대로인데 왠지 대화가 잘 이어지질 않았다. 우리한테 존대를 하시는 게 걸리긴 했다. 저녁에 큰댁 서방님 전화를 받고 황당했다. 우리를 몰라본 거다. 어떤 내외가 다녀갔다고 하셨단다. 큰어머니, 어쩌면 좋아요. 일시적인 기억장애..

주관적 산문 쓰기 / 석현수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동안 수필을 쓰면서 치열하게 탐구한 기록이다. 많고 많은 수필이론에 대한 의구심과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흥미로운 수필 이론을 알려준다. 언제 읽어도 절창인 윤오영의 수필로 쓴 수필이론 - '양잠설'과 '곶감과 수필'도 있다. 거의 외우다시피한 운정의 수필론도 반갑다. 에세이와 수필의 원류를 찾아 소개한다. 몽테뉴의 에세이와 베이컨의 에세이를 주제별로 비교 분석뿐아니라 원문도 소개한다. 몽테뉴 이전의 플라톤, 키케로, 세네카, 플로타르코스를 에세이의 선구자로 보고 몽테뉴 이후는 찰스 램, 버트란트 러셀, 그들의 글도 소개한다. 에세이와 수필 사이의 고민도 상당하다. 한국수필의 전성시대를 풍미한 김진섭, 이양하, 안병욱의 글도 소개한다. 10년 동안 쓴, 시집, 번역서, 수필집에 이번..

놀자, 책이랑 2022.01.22

제1회 구지가문학상 수상 소감 -조정인

제1회 구지가문학상 수상 소감 ​ 내 안에 웅성거리는 무수한 타자들​ ​구지가(작자미상)는 주술성이 강한 역동적인 노동요입니다. AD 40~50년 경, 김해 구지봉에서 신(神)의 계시가 들려와 모든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신의 말씀대로 흙을 파헤치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노래를 불렀다 해요. 300여 명의 군중이 춤추며 발을 구르고 노래를 부르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로 싼 금빛 그릇이 내려왔다지요. 그릇에는 6개의 황금알이 담겼는데 알들은 6명의 귀공자로 변했다지요. 귀공자들은 각각 6가야의 왕이 되었고요. 그 중 제일 큰 알에서 나온 귀공자가 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이라고 합니다. ​ ​아득한 시간성 속에 고고한 숨을 내쉬는 신화의 한 가운데, 구지가가..

산문 - 필사 + 2022.01.21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 조정인

제1회 구지가 문학상 수상작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조정인 지금은 산사나무가 희게 타오르는 때, 나여. 어딜 가시는지?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내가 나를 경유하는 중이네. 흰 터번을 쓴 어린 수행자 같은 산사나무 수피를 더듬는다. 내가 나를 더듬고 짚어보고 헤아려 보듯, 나는 재에 묻혀 움트는 감자의 눈, 움트는 염소의 뿔, 움트는 붉은 승냥이의 심장, 봄 나무가 내민 팥알만 한 새순, 겨울 끄트머리에 걸린 시샘달* 방금 운명한 망자의 움푹 꺼진 눈두덩, 생겨나고 저무는 것들 속에 눈뜨는 질문. 나여, 나는 어디로부터 나를 만나러 산사나무 하얗게 타오르는 이 별에 왔나? 어제 나는 스물일곱에 요절한 나를 조문하고 왔네. 꽃 같은 얼굴이 웃고 있는 영정 앞에 예를 갖추고 향을 ..

시 - 필사 2022.01.21

과타박스에서

과천의 한 샘댁을 '과타박스'라고 한다. (앗, 스타벅스 불매운동인데.. ㅠㅠ) 코로나19 때문에 식당가기가 무서워서 이곳에서 시 합평모임을 했다. 그것도 인원 제한때문에 몇 달만에 모였다. 늘 제철음식으로 우리의 체중을 늘려준다. 오늘도 굴밥에 방어회, 활전복과 와인까지. 바로 내린 커피에 오래 끓여둔 대추차. 풀 서비스를 받았다. 시 합평과 많은 시가 어디로 가나요. 수다, 수다~~ 이 수다가 참 좋다. '오늘의 말씀'은 선생님의 감방생활 중 이야기가 기막혔다. (그 시절 구속하게 했던 시집이 개정증보판으로 곧 나온다고 한다. '학교'라고도 하는 교도소를 갈 만큼 불온한 시인지 궁금하다.) 요구르트 왕창 붓고 카스테라를 부셔넣어 밀봉해서 한 달간 두면 술이 된단다. 띵요~~~ 이제 다달이 모일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