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5 3

닿고 싶은 곳 / 최문자

닿고 싶은 곳 최문자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시 - 필사 2022.01.25

역행 / 권영옥

역행 권영옥 한 화분에 베고니아 두 포기가 포개진 걸 사왔다 물 주고 영양제를 주어 둘은 밤마다 이슬 적시는 놀이에 빠진 줄 알았는데 시샘하고 밀어내어 한 포기가 명경을 포기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전생의 악연이 내외라는 말처럼 너희도 몸 속에 낯선 생각을 품고 이곳으로 왔구나 보이지 않게 뿌리와 뿌리가 자리다툼을 해서 한 꽃이 수렁 냄새를 풍긴다 몽글하던 외피가 겹겹 비늘에 싸여 서로에게 단맛이 되지 못하는 운명은 일찍 한 쪽을 저물게 한다 '겨울길'*에서 신부가 청년의 운명을 바꿔 한 청년이 파란 낙엽이 되고. 한 청년은 로맨스를 얻었다지, 풀밭을 얻었다지 가을 속에 서 있는 나는 잎 속에 담긴 빛을 모르고 눈앞의 그림자만 보인다 영혼의 발부리가 어둠에 닿은 탓이다 운명은 왜 한쪽으로만 편입되려 하는지 ..

시 - 필사 2022.01.25

미리 세배

섣달 그믐도 아니니 묵은세배라고 할 수도 없고, 지난주에 88세 큰어머니가 다치셨다고 해서 바로 다녀왔다. 오른쪽 다리 무릎 위까지 깁스를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세상사 모두 내 맘대로 안되는 것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않는다, 그때 운이 나빠서 이렇게 된 것이지 운전자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누군들 아프고 싶어 아프겠냐, 다치고 싶어 다치겠냐'고. 골목에서 차를 피하다 넘어져서 생긴일이라며 담담히 이야기하신다. 대화 중간중간 노래를 흥얼거리신다. 초긍정적인 성격은 그대로인데 왠지 대화가 잘 이어지질 않았다. 우리한테 존대를 하시는 게 걸리긴 했다. 저녁에 큰댁 서방님 전화를 받고 황당했다. 우리를 몰라본 거다. 어떤 내외가 다녀갔다고 하셨단다. 큰어머니, 어쩌면 좋아요. 일시적인 기억장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