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아롬다온 개조심 / 류창희

칠부능선 2022. 1. 29. 12:56

부산의 류창희 선생의 맹렬한 삶을 또 바라본다. 

여리여리한 몸의 연유부터 열심으로 내딛는 마음까지 훤히 읽힌다. 

형식을 벗고 자유롭지만 바닥에는 공자님 말씀이 깔려있다. 선생이 진행하는 '논어강의실' 풍경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벗음으로 스스로 치유되는 수필에 정점을 찍고, 바뀐 세속의 풍경과 속내를 보여준다.

글 너머의 의미를 생각하며 슬쩍 웃음이 지어지기도 하고 맘이 쓰리기도 하다.

동시대 동지역을 살아 낸 이야기에서는  곳곳의 추억에 함께 젖었다. 여행지도 같은 경로가 많은데, 그야말로 차별화되어 새롭게 읽었다. 

부산문화재단에서 기금을 받아 만든 책이라니 더욱 반갑다. 

 

부산 여행을 갔는데, 그곳 게스트하우스 잠자리에 누워 류 선생이 밤새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준 듯 하다.  

요즘 내가 하는 설 인사를 전하고 싶다. 설은 설렁설렁 지내자고, 아니 일년 내내 설렁설렁 살면 좋겠다.

 

 

 

* '남이 나를 속일까 지레짐작하고, 남이 나를 불신할까 억측(不逆詐 不億不信)'하는 내 개의 품종은 '편견'과 '선입견'이다. 매사 미리 조심한다는 핑계로 선입견으로 차단하고, 오만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무릇, 생명이란 소중하다. 겁쟁이 두 놈을 잘 다독여야 한다. 남의 고견(?)이 문제가 아니다. 상대를 존중하려면, 우선 내 안에 갇혀있는 견공들과 사이좋게 지내보자. (65쪽)

 

* 나는 중학교 1학년 봄 소풍 날 이후부터 자신감을 획득했다. 내가 아는 것을 스스로 존중했다. 수학 빵점에 물상을 50점 맞아도, 실수만 하지 않으면 국어는 33문제를 거의 다 맞췄다. .... 은행의 잔액처럼 풀꽃 정서가 차곡차곡 저장되었다. 자산이다. 혼자 놀아도 따돌림을 당해도 조금도 심심하지 않은 아이가 되었다. 

 촌村발 하나로 나만의 아롬다온 캐릭터를 구축했다. (79쪽)

 

* 성격이 팔자다. 나는 편안함에 안주하지 못한다. 남들 보다 종종걸음쳐도 소득은 별로 없다. 불우가 자산이요, 박복이 에너지였다. 가진 것 갖춰진 것 없이도 꼿꼿한 자존감이 무기다. 묵객墨客이 되어 신변을 갈고 또 갈았다. (127쪽)

 

* 인생의 여정旅程이란, 언제 어디로 어떻게 얼마나 더 가야할지 모른다. 인도 여행은 환경이 열악하여 속눈썹도 무겁다. 그렇다. 길거리의 걸인들, 기차 지붕 위의 방랑객들, 일등석에서 체인을 감는 부호들, 우리는 서로 집도 절도 모르는 길 위의 사람들이다. 인도든 한국이든 도둑은 없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부주의만 있다. 무슨 짐이든지 적게 가지면 잃을 것도 적고, 아예 없으면 잃을 것마저 없을 것이다. (215쪽)

 

* 강의는 성실함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성실함은 도덕 교과서 같아 하품이 부르면 금방 속눈썹이 내려온다. 계절의 색조도 넣고 때론 허세와 주책도 부린다. 다행인 것은 나는 사람들 앞에만 서면 신바람이 난다. 일단 발동이 걸리면 신들린 듯 빙의한다. 그 순간은 씻김굿을 하는 무당이다. 앞에 계신 분들의 장난기 다분한 눈빛과 설사처럼 터지는 웃음에서 나를 비춰본다. 수강자들의 반응이 곧 강사의 거울이다.  (233쪽)

 

언제든 가능하면 류선생의  '신들린 강의'를 초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