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 27

만남과 소식

오랜만에 올가정원에서 4인이 점심을 먹었다. 자주 보는 3인과 오랜만에 보는 1인, 그 1인이 포이세티아 분 3개를 가져왔다. 마침 작은 빈 화분이 있어서 그대로 옮겨심었다. '한 달 기쁨'이라며 건넸는데... 한 달이라도 잘 볼 수 있기를. 거의 20년 넘게 본 그는 여전히 '아가씨' 같은데 정년이 6개월 남았단다. 내년엔 책을 묶으리라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에서 공표를 한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공통의 숙제를 끙끙거리며 달고 산다. 서로 애틋해하면서. 오늘 이야기는 어찌 정치권에 대한 게 많았다. 주변에 극한 발언을 하는 아니 극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정치에 신경을 써야하는 건, 그들 중 가장 형편없는 사람의 통치를 받지 않기 위해서다. 왕조시대..

죽음을 배우는 시간 / 김현아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을 의사가 알려준다. 내가 평소 생각했던 죽음에 대한 생각과 겹치는데, 그는 의사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크다. 또 용기있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같은 업의 종사자나 사용자에게 눈총받을 수도 있는 사항들이다. 늙고 병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병원을 가지 말라는 말이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행해지는 의료행위를 알려준다. 우리가 아는 소생의 상징인 심폐소생술의 실상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는 연신 끄덕이며 읽었다. 딸들에게 전하는 자신의 로 마무리한다. * 14세기 흑사병 창궐 이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죽음의 춤'이라는 도상에서 의사들은 별 볼일 없이 소변통 하나 들고 죽음에게 끌려가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현대..

놀자, 책이랑 2021.12.20

피가지변(皮哥之辯) / 피천득

피가지변(皮哥之辯) 피천득 ‘皮哥가 다 있어!’ 이런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皮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 두터운 전화번호부에도 皮가는 겨우 열이 될까 말까 하다. 현명하게도 우리 선조들은 인구 소동이 날 것을 아시고 미리부터 산아 제한을 해왔던 모양이다. 皮가가 金가보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다. 우간다 사람에게는 닥터 김이나 닥터 피나 다 비슷하리라. 그래도 왜 하필 皮씨냐고? 옛날에 우리 조상께서 제비를 뽑았는데 皮씨가 나왔다. 皮가도 좋지만 더 좋은 성(姓)이었으면 하고 다시 한 번 뽑기를 간청했다. 그때만 해도 면 직원들이 어수룩하던 때라 한 번만 다시 뽑게 하였다. 이번에는 毛씨가 나왔다. 毛씨도 좋지만 毛는 皮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셨기에 아까 뽑았던 皮를 도로 달래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대대로..

산문 - 필사 + 2021.12.17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 이동순

종가의 종부 이동순 선생님 오래전, 분당수필 강의실에서 만났던 모습은 호리호리한 큰 키에 고운 눈매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도 종부가 아니면 불가능한 여러 시속에 관한 글을 썼다. 어제 수업 중에 오셔서 책만 두고 갔다. 잠깐이라도 만났으면 더 좋았을걸... 집에 와서 담숨에 읽었습니다. 유년시절부터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어있다. 맺힌거, 꼬인 것 없는 순수한 삶에 킥킥 웃음도 났지만, 후반부에 큰 시련도 잘 이겨내고 있다. 해학과 함께 잘 읽히며 가슴 저릿한 성찰에 이르게 한다. 2011년 남편의 루게릭병 발병은 의사들이 5년을 기한 잡았지만, 지금까지 잘 이겨내고 계신다. 부군의 기적 행진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빈다. 장하다. 이땅의 종부로서 잘 살아낸 시간에 박수를 보낸다. 내가 선물받은 네잎크로버의..

놀자, 책이랑 2021.12.16

한국수필의 골계(滑稽)이론 / 김진악

한국수필의 골계(滑稽)이론 김진악 골계이론 뒤돌아보기 1960년대 우리나라는 웃음의 땅이 아니고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이었다. 그 암울한 시대에 태평하게 수필을 논하고 웃음을 말한 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윤원호 교수였다.(이하 경칭 생략) 그는 논문 을 이화여대 80주년 기념논문집(1966)에 발표하였다. 순 한글로 제목을 붙인 이 글은 수필문학과 여러 갈래의 웃음과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다룬 최초의 연구논문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1950년대 후반, 학계에서는 여러 학자가 참여하여 골계의 본질을 따지는 맹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정립한 골계이론이 그 후 문학작품의 골계성을 연구하는 이론의 전범이 되었다. 아마 윤원호는 그들이 논의한 웃음의 논리를 수필작품에 적용해보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였다..

산문 - 필사 + 2021.12.16

5구역 / 신정민

5구역 신정민 은밀한 데이트 장소로 공동묘지만한 곳이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후회와 함께 시작된 사랑은 묘역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 곁에 있어 들을 수 없었던 속삭임이 있었다 묻힌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죽음의 트럼펫 소리 누군가 오래도록 데니보이를 연습하고 있다 말이 필요 없는 데이트 모르는 자의 무덤 앞에 조화를 바치는 햇살들 인생은 요약되지 않아서 어려웠다 우리는 결국 모르는 사이 잊지 못할까 봐 잊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서 종종 만나곤 했다

시 - 필사 2021.12.14

사랑은 끝이 없다네 / 박노해

사랑은 끝이 없다네 박노해 사랑은 끝이 없다네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시간이 흘러서도 그대가 내 마음속을 걸어다니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강을 건너서도 그대가 내 가슴에 등불로 환하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대 이름만 떠올라도 푸드득, 한순간에 날아오르겠는가 그 겨울 새벽길에 하얗게 쓰러진 나를 어루만지던 너의 눈물 너의 기도 너의 입맞춤 눈보라 얼음산을 함께 떨며 넘었던 뜨거운 그 숨결이 이렇게도 생생한데 어떻게 사랑에 끝이 있겠는가 별로 타오른 우리의 사랑을 이제 너는 잊었다 해도 이제 너는 지워버렸다 해도 내 가슴에 그대로 피어나는 눈부신 그 얼굴 그 눈물의 너까지 어찌 지금의 네 것이겠는가 그 많은 세월이 흘러서도 가만히 눈감으면 상처 난 내 가슴은 따뜻해지..

시 - 필사 2021.12.14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시 - 필사 2021.12.14

짧은 수다 / 노정숙

짧은 수다 노정숙 생텍쥐페리는 감탄을 잘하는 행복한 아이였대요. 인생의 역경이 그를 지각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항공로가 그를 작가로 만들고, 유배가 그를 성자로 만들었대요. 영웅 이상으로, 작가 이상으로, 그의 착한 마음이 가까이 다가왔어요. 착한 마음이 늘 꿈꾸게 하고 희망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좋아하잖아요. 전쟁보다 더 두려운 것은 마음에 희망을 잃는 것이지요. 폐허가 된 촌락, 이산가족, 죽음…. 이런 것들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공동체 정신의 파괴라고 알려주었어요. 감탄을 잘하는 생텍쥐페리는 우리를 무시로 경이로운 세계로 데려다주지요.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면 ‘불운’이 무엇인가 느껴져요.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비평가의 말이 아니라 자연의 말이라는 것으로 비평가들에게 반감을 샀지요. 시대를..

개의 시간 / 임이송

원주에 자리잡은 임이송 작가의 소설책이다. 강릉문화재단과 강원도에서 기금을 받아 묶었다. 20여년 전, 수필반 인연이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마음으로 애틋하다. 드문드문 전해온 그의 소식에 안타까움이 많았다. 잘 건너와 이제 평온한 듯하여 고맙다. 그 격랑의 시간이 소설을 쓰게 했나 싶기도 하다. 주변에 '진국'이라고 말하는 몇 사람 중에 꼽는다. 언제든 그를 만나면 든든한 보양식 같은 걸 먹이고 싶다. 그리고 게이샤 커피가 아닌 보양차로 속을 채워주고 싶다. 말미에 있는 을 먼저 읽어서인지 자꾸 수필적 시선으로 읽게된다. 밀도있게 잘 엮어서 단숨에 읽힌다. 박수를 보낸다. 반려동물 화장장에서 시작하는 , 말로만 듣던 생소한 풍경을 자세히 본다. 대를 잇는 고난 속에서 같은 마음결을 가진 사람이 사랑..

놀자, 책이랑 2021.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