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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지변(皮哥之辯) / 피천득

칠부능선 2021. 12. 17. 17:22

피가지변(皮哥之辯)

피천득

 

 

皮哥가 다 있어!’

이런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 두터운 전화번호부에도 가는 겨우 열이 될까 말까 하다. 현명하게도 우리 선조들은 인구 소동이 날 것을 아시고 미리부터 산아 제한을 해왔던 모양이다. 가가 가보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다. 우간다 사람에게는 닥터 김이나 닥터 피나 다 비슷하리라.

그래도 왜 하필 씨냐고?

옛날에 우리 조상께서 제비를 뽑았는데 씨가 나왔다. 가도 좋지만 더 좋은 성()이었으면 하고 다시 한 번 뽑기를 간청했다.

그때만 해도 면 직원들이 어수룩하던 때라 한 번만 다시 뽑게 하였다. 이번에는 씨가 나왔다. 씨도 좋지만 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셨기에 아까 뽑았던 를 도로 달래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대대로 우리는 씨가 좋은 성() 중의 하나라고 받들어왔다. 일정(日政) 말기에 이른바 창씨라는 짧은 막간 희극이 있었다. 자칫 길었더라면 비극이 되는 것을, 짧은 것이 천만 다행이다.

성은 가라도 옥관자(玉貫子) 맛에 다닌다는 말이 있다. 관자라는 것은 , 옥 또는 뼈나 뿔로 만든 것으로 망건줄을 꿰는 단추같이 생긴 작은 고리다. 옥관자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새김을 넣은 것은 당상 정삼품(堂上正三品)에 있는 사람이 다는 것이요, 새김을 넣지 않은 것은 종일품(從一品)이나 달 수 있는 것이다.’ 씨가 달던 것은 물론 후자는 아닐 게고, 전자라 하더라도 상당한 양반이 아닐 수 없다.

그 런데 희성(稀姓)이기는 하지만 어찌하여 역사에 남은 이름이 그다지도 없었던가? 알아보니, 皮氏의 직업은 대개가 의원(醫員)이요, 그중에는 시의(侍醫)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전(御前)까지 가까이 들어가려면 적어도 당상 정삼품은 되어야 했다. 의원은 양반이 아니요 중인이나, 변법으로 피주부(皮主簿)에게 옥관자가 허락되었던 것이다.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 아이는 옥관자는 못 달더라도 우간다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올 것이다.

나의 선친께서는 종로, 지금 화신 건너편에서 신전을 하였다. 씨가 가죽신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성 밑에 붙는 칭호가 없어 허전하였던지 구한(舊韓) 말기에 주사(主事)라는 벼슬을 돈을 내고 샀다. 관직이라기보다는 칭호를 얻은 것이다.

내가 여섯 살 때 피주사댁 입납(皮主事宅入納)’이라고 쓴 봉투를 본 일이 있다. 그리고 우리도 양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돈 주고 살 바에야 왜 겨우 주사(主事)’를 사셨는지 모를 일이다. 돈만 많이 내면 승지(承旨)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진사(進士)라는 칭호를 좋아한다. 정승(政丞)보다도 판서(判書)보다도 진사를 좋아한다. 그러나 진사는 팔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선친께서는 주사(主事)로 만족했던 모양이다. 주사(主事)가 아닌 나는 선생 하면 된다. 어떤 선생이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설사 있더라도 키 작은 선생이라 하면 그만이다. 이는 가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섭섭한 것은 씨는 서열에 있어서 가나다순으로 하나 ABC순으로 하나 언제나 꼴찌에 가깝다는 것이다. 나는 학교 다닐 때 키가 작아서 횡렬로 서서 번호를 부를 때도 늘 말석을 면치 못하였다.

 

성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 이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천득(千得)이라 하면 그리 점잖은 이름은 못된다. 이름이라도 풍채 좋은 것으로 바꿔 볼까 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부르던 이름을 내 어찌 고치랴! 로즈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여전히 향기로운 것이라는 말은 줄리엣 같은 소녀의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로즈라는 음향 속에는 영국 사람들의 한없는 정서가 깃들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즈라는 어음이나 글자는 가지가지의 인연 얽힌 추억을 가져다줄 것이다.

원래 나는 하늘에서 얻었다고 천득(天得)인데, 호적계의 과실로 하늘 천()자가 일천 천()으로 되어버렸다. 이름풀이 하는 사람은 내가 부자로 살 것을 이름의 획수가 하나 적어서 가난하게 지낸다고 한다. 내가 부자로 못 사는 것은 오로지 경성부청 호적계 직원의 탓일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50년 나와 함께 하여, 헐어진 책등같이 된 이름 금박(金箔)으로 빛낸 적도 없었다. 그런 대로 아껴 과히 더럽히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