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한국수필의 골계(滑稽)이론 / 김진악

칠부능선 2021. 12. 16. 12:08

 

한국수필의 골계(滑稽)이론 

김진악

 

 

 

골계이론 뒤돌아보기

 

1960년대 우리나라는 웃음의 땅이 아니고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이었다. 그 암울한 시대에 태평하게 수필을 논하고 웃음을 말한 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윤원호 교수였다.(이하 경칭 생략) 

그는 논문 <웃음과 수필>을 이화여대 80주년 기념논문집(1966)에 발표하였다. 순 한글로 제목을 붙인 이 글은 수필문학과 여러 갈래의 웃음과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다룬 최초의 연구논문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1950년대 후반, 학계에서는 여러 학자가 참여하여 골계의 본질을 따지는 맹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정립한 골계이론이 그 후 문학작품의 골계성을 연구하는 이론의 전범이 되었다. 아마 윤원호는 그들이 논의한 웃음의 논리를 수필작품에 적용해보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논문의 결론은 웃음이 전적으로 수필의 편은 아니었다. (본문에서 익살골계는 웃음의 총칭으로 쓴다.)

 

웃음을 수필의 속성이라고 단정하고 그 이론을 따랐다면, 한국수필의 양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문단에서 수필의 골계성을 주장한 논의는 이미 1930년대에 제기되었다. 

1930년대는 절망의 시대였다. 조선 식민지화가 완성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문인들이 펜을 들고 나라를 찾기는 글렀고, 글이나 갈고 다듬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한국수필문단이 황금시대라고 자화자찬을 하는데, 1930년대의 수필문단도 전성시대를 구가하였다. 문필가든 비 문필가든 수필은 모든 지식인이 즐겨 쓰는 장르였다. 문예지가 쏟아져 나오고 신문에도 수필란이 화려한 면을 차지하였다. 1938년에 창간한 수필전문잡지 <박문(博文)>(1938)과 본격 문예지 <문장>(1939), <인문평론>(1939)의 수필란은 작품성과 예술성이 풍부한 수필창작의 산실이었다. 그때 한국 최초의 <조선문학전집>(1938) 7권이 간행되었는데, 그 중 5권이 수필기행집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0년대의 수필이 교과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현상은 당시 수필문학의 위상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본격 수필의 형성기를 맞아 수필 작품을 애독하고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 수필의 문학개론적 이론의 정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수필문학에 관한 이론의 모색은 김기림김광섭임화 등 주로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들은 수필문학의 내용과 형식, 장르의 문제와 문체를 따졌는데, 공통적으로 수필의 골계성에 대하여 논급하였다. 시인이며 수필가였던 김기림은 수필의 골계성을 중시하고 매우 강조하였다.

향기 높은 유머와 보석과 같이 빛나는 위트와 대리석같이 찬 이성과 아름다운 논리와 문명과 인생에 대한 찌르는 듯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와 그러한 것들이 짜내는 수필의 독특한 맛이 이 시대 문학의 미지의 처녀지가 아닐까 한다. <수필을 위하여/신동아 19339월호>

 

김기림은 한국수필의 처녀지의 개척이 당대 문학의 미지의 과제라고 주장하고, 구 처녀지를 개발하면 거기에서 유머와 위트와 아이러니가 짜내는 독특한 맛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수필문학의 골계성을 강조한 이 주장은 놀라운 발상이고 괄목할만한 이론이었다. 김기림이 교양 잡지의 문예시평란에 수필론을 발표한지 4개월 후, 김광섭은 문예전문지에 <수필문학소고>를 썼다. 이 글은 비록 짧은 문장이었으나 수필문학의 본질을 집약한 명수필론으로서, 지금까지도 교과서와 문학개론서에 실려있고, 수필이론의 헌법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이 글에서도 수필의 유머와 위트의 효용성을 재론하였다.

 

이렇게 잡다한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는 수필은,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겠고 위트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소성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다. 이 천성스런 유머와 보석 같은 위트는 수필의 본성같이 인식되어, 일대의 수필가 램이나 해즐리트에게 있어서 빛나고 있다. <수필문학소고/문학 19341월호>

 

김광섭은 수필은 흥미가 있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수필을 읽는 재미는 수필이 담고 있는 유머와 위트에서 발생하고 유머가 천성적이라면 위트는 지성의 산물이라 하였다. 수필의 골계성이 그 속성은 아니지만 수필 속에 숨어있는 해학과 기지로 인하여 위대한 수필작품이 창작된다고 피력하였다. 다시 말하면 골계성이 없는 수필은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수필의 골계적 요소가 그 속성은 아니지만 본질과 같이 인식된다고 강조하였다.

 

지금까지 한국 골계수필의 이론사를 뒤돌아보았는데, 1960년대 이후 한국수필문학의 비약적 발전과 더불어 골계수필의 영역이 넓어지기도 하였다. 한국 최초의 수필문학개론서인 <수필ABC>(1965)에서 최승범은 유머와 위트를 수필의 본질이라고 서술하였다. 1972SSU 창간되어 수필문단에 지대한 공적을 이룩한 <수필문학>19801월호를 유머수필 특집으로 장식하였다. 또한 박연구는 한국유머수필 58<바보들의 천국>(1984)을 출간하였다. 근간에는 김태길공덕룡 등이 수필의 골계성을 언급하였고, 공덕룡은 골계수필집 <웃음의 묘약>(1991), 서임수는 <삼천궁녀 거느린 뜻은>(1990)을 선보였다.

 

모아 놓은 웃음과 찾아낸 웃음

 

우리 주위에 산재한 웃음거리, TV나 신문에 보이는 비웃음거리를 늘어놓은 글은 진정한 골계수필이 아니다. 이런 수필작품은 작가가 손쉽게 얻은 웃음거리를 모아 놓았을 뿐이고 작가의 창작이라 할 수 없다. 작가는 수동적으로 웃음을 수용할 뿐이고, 그러한 골계상황을 연출한 자는 작가가 부딪친 대상 자체이지 작가가 창출한 웃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골계수필의 웃음은 작가가 창조한 웃음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서 발견된 웃음이거나 단순히 목격된 웃음이다. 이런 웃음을 객관적 골계라 하고 객관적 골계만을 나열한 글을 객관적 골계수필이라 한다. 웃음을 모아 놓은 수필, 객관적 골계수필은 진정한 골계수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한국의 골계수필은 대개 객관적 골계수필이다.

소재는 문학의 절대 불가결한 요소다. 웃음거리 없이 골계수필을 쓸 수 없다. 골계수필 작가는 누구나 보고 듣는 웃음거리에서 누구도 보지도 느끼지도 생각지도 못한 골계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골계적 형식으로 표출해야 골계수필이 된다. 일생생활에서 웃거나 농담을 하거나 익살스러운 일을 벌일 때, 웃음을 찾아낸 수필을 주관적 골계수필이라 한다.

 

모든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골계감정을 가지고 있다. 웃음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최상의 감정이다. 골계감정이 유발시키는 웃음, 주고받는 농담, 익살스러운 일은 골계수필의 우스갯감이다. 웃음거리가 없으면 골계수필을 쓸 수 없다. 골계수필가는 누구나 보고 듣고 느끼는 웃음거리에서, 누구도 보지도 느끼지도 생각지도 못하는 웃음을 찾아내고, 그 웃음을 골계형식으로 표출한 수필이 골계수필이다. 작가가 창조한 웃음을 작가의 개성적 골계형식에 담지 않으면 골계수필이 아니다. 이와 같이 작가가 웃음을 찾아서 쓴 수필을 주관적 골계수필이라 한다.

골계이론이 습득이 쉽지 않고 실제 창작은 더 어렵다. 목석같이 단정한 독자를 글로 웃기기란 대단히 어렵다. 억지로 웃기려 들면 천박해지기 십상이고, 웃음이 지나치면 품위가 떨어진다. 실없이 웃는 자가 비웃음의 대상이 되듯, 실답지 않은 골계수필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된다. 더구나 엄숙주의, 경건주의가 팽배한 수필문단에서 웃음판을 벌였다간 무뢰한으로 내몰릴 위험이 크다.

 

수필문장의 형식이 골계수필과 비 골계수필을 결정짓는다.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다. “쌀이 떨어지고 연탄도 없고 애들 월사금도 못 내고 집세도 밀렸어요.” 남편이 타이른다. “여보, 한 마디로 돈 하나가 없다고 하지.” 이 농담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을 구제한다. 감기가 나갈 줄을 모른다. “독감이 내 몸에 들어와서 가장 성공하였다.”고 하면, 감기도 보따리를 쌀 것이다. 금의환향한 사나이가 동네 어른들이 계시는 사랑방에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한 노인장이 입을 열기를, “자네가 동경 하버드대학을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라고 한다. 방안에 누구도 하버드대학이 미국에 있다고 머퉁이를 주지 않는다. 이 대화는 농촌의 능청맞은 웃음을 말해준다. 첩첩산골을 묘사하여 이 마을에 도둑이 들었다간 도적질하는 마음을 도둑맞겠다.”고 한다. 도둑도 도적맞을 것이 있다. (필자김국자이윤기이상의 글을 내가 고쳐 썼다.)

 

소태를 씹는 것 같은 무미건조한 문장 가운데 익살스러운 한 단어, 익살스러운 한 문장, 익살스러운 한 단락이 그 문장을 생동하게 바꿔놓는다. 웃음의 힘이다. 더 나아가 글 전체가 웃음으로 차고 넘친다면, 이 수필이야말로 빼어난 골계수필이라 하겠다.

맥없는 사물을 쪼개서 낱낱이 이름을 붙이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 학자다. 웃음의 갈래는 실로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웃음을 웃으면서 연구하지 않고 울면서 연구한 이론에 따르면, 주관적 골계의 하위개념은 해학풍자기지반어 등이다. 따라서 주관적 골계수필을 해학수필, 풍자수필로 크게 양분할 수 있다. 대개 기지수필반어수필이라는 용어는 상용하지 않는다. 기지와 반어는 해학과 풍자와 섞여서 웃음을 증폭시킨다. 해학수필의 웃음은 부드럽고, 풍자수필의 웃음은 사납다.

 

부드러운 웃음과 사나운 웃음

 

해학(諧謔)의 웃음은 부드럽다. 가냘픈 미소에서 억센 폭소까지 웃음의 소리와 성격과 태도는 천차만별이다. 악마의 웃음이 있고, 모나리자의 웃음이 있으며, 부처님의 자비로운 웃음이 있다.

우리 할매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다. 그 많은 웃음 가운데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웃음은 해학의 웃음이 아니다. 그 웃음은 여유의 웃음, 화해의 웃음, 합창의 웃음이다. 높은 자리에서 남을 깔보거나 비아냥거리는 웃음이 아니고, 대상에 대하여 낮거나 같은 위치에서 남에게 관대하고 겸손한 웃음이다. 이와 같은 웃음의 소유자만이 훌륭한 해학수필을 쓸 수 있다. 웃음이 없거나 잃어버린 자나, 지나치게 열정적이거나 격렬한 자도 해학수필을 쓰는 일을 단념해야 한다. 이런 작가는 풍자수필을 쓸 적격자다.

 

해학은 웃음의 반사운동을 유도해내는 자극의 하나라고 한다. 해학수필가는 독자의 웃음을 자극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선천적이며 기질적이다. 해학작가는 타고나야 한다. 골계적 성격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작가는 하나도 우습지 않은 대상의 태도동작표정말씨 등에서 웃음을 발견하고, 대상 자체가 우스운 사물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웃음의 세계를 창조한다. 최상의 해학수필은 무의식적 창조의 소산이다. 고의로 웃기려는 작가는 스스로 조소의 대상이 된다.

 

웃음을 야기하는 대상은 인간의 불합리우매실책모순비속 등이다. 이 모든 인간의 부정적 대상은 웃음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는데, 이 모두를 부정하는 작문은 해학수필이 아니다. 해학의 세계는 긍정을 위한 부정은 있으나 부정을 위한 부정은 없다. 부정을 부정하는 웃음은 거칠고, 부정까지도 긍정하는 웃음은 높은 차원의 골계다. 해학은 인간의 모든 비행, 부정조차 포용하고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결함까지도 초월하는 웃음이다. 긍정의 대상이든 부정의 대상이든 웃음으로 색칠하는 문장이 해학수필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늘 불지 않고 사나운 폭풍이 불어닥칠 때도 있다. 이 사나운 웃음이 풍자의 웃음이다.

 

풍자(諷刺)의 웃음은 거칠고 억세고 사납다. 나와 네가 같이 웃는 웃음이 해학이라면, 나와 이웃은 웃지만 너는 우는 웃음이 풍자다. 세상에는 웃을 일이 많지만, 비꼴 대상은 더 많다. 인간의 부정악습우행(愚行)위선악덕이 영원히 존재하는 한 풍자의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풍자는 이와 같은 인간의 비행을 야유하고 고발하고 폭로하고 조소하는 쓰디쓴 웃음이다. 풍자의 대상은 개인은 물론 인간이 어지럽힌 사회정치국가와 전 인류전 세계를 포괄한다. 이와 같은 풍자 정신에 입각한 문학 행위는 사회문학정치문학이 된다.

 

해학의 웃음 속에는 너와 내가 같이 있고, 풍자의 웃음 속에는 나는 밖에 있고 너는 안에 있다. 해학의 주체는 낮은 자리에 있고, 풍자의 주체는 높은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해학은 대상과 같이 웃고, 풍자는 대상을 비웃는다. 해학이 사물에 대하여 긍정하는 태도에서 발생하는 데 반하여, 풍자는 비행, 부정에 대한 공격, 부인의 양식이다. 풍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역설반어과장축소기지방식이 동원되고 때로는 폭언과 욕설을 퍼붓고 마침내 풍자의 의지가 흔들릴 때 냉소자조의 경우에 이른다. 이와 같은 풍자의 태도에서 발생하는 문학은 분노문학증오문학이 된다.

 

분노문학증오문학사회문학정치문학이 어떻게 풍자문학풍자수필이 될 수 있는가? 풍자에 해학이 내포되어 있으면 풍자수필이고 해학이 없으면 비 풍자수필이다. 풍자수필도 주관적 골계수필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반드시 웃음을 수반해야 한다. 다만 해학수필의 웃음은 일차적 요건이지만, 풍자수필의 웃음은 이차적으로 부수되는 웃음이다. 그러므로 풍자+해학=풍자수필의 등식이 성립된다. 풍자와 해학이 손을 잡고 풍자의 칼날을 둔화시킨다. 모든 문학행위는 인간의 선행을 장려하고 비정을 교정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웃음이 가미된 풍자수필 또한 인간주의 정신에 뿌리를 둔다.

 

어느 시인은 꽃송이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다. 어떤 스님은 남의 속을 찌르는 송곳 말, 머리를 내리치는 도끼 말, 몸을 때리는 작대기 말이 성행하는 사회를 꾸짖었다. 웃음을 대동하고 있더라도 풍자수필은 인상이 험하다. 더구나 한국의 작가는 으레 목욕재계한 다음 정좌하고 글을 쓰는 타성이 있어서, 익살을 부리는 글 옆에 가지도 않는다. 풍자수필이 뿌리내릴만한 문단풍토가 아니다. 해학수필은 거의 보이지 않고 풍자수필은 찾아보아야 한다. <피가지변>을 쓴 피천득, <삼등석><방청석>을 쓴 김태길이 한국 골계수필의 대들보 노릇을 하고 있다.

 

해학수필을 위하여

 

시인 서정주는 생시에 요새 한국의 시는 맛이 없다.”고 꾸짖었는데, 맛이 없다는 꾸지람은 시작품이 재미가 없다는 말이다. 오늘의 한국수필은 어떤가? 독자가 수필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는 먼저 작품의 고도한 작품성과 예술성에 있겠으나, 해학수필과 풍자수필이 그 재미의 조그만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겠다. 재미없는 수필은 독자가 외면한다. 해학수필이라는 용어는 낯설고, 유머 에세이라는 외래어가 낯익은 시대가 되었다. 우리 웃음을 표현한 글을 유머 에세이라고 하는 우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서양인이 만들어 놓은 미학이론의 용어를 끌어다 썼으나, 웃음을 논의하는 학술용어도 우리말로 바꿔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金鎭嶽 :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 후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익산 남성고등학교와 서울 배재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배재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취임, 인문대학장과 박물관장을 역임하고 현재 배재대학교 명예교수이다. 한국인의 웃음」 「한국인의 해학」 「한국인의 익살등을 10여 개 월간지에 연재하였으며, 한국 해학문학 연구서설」 「한국 골계문학 형성론」 「고려문학의 골계성 연구의 글을 썼다. 저서로는 익살』 『아름다운 틀』 『유머에세이 34이 있다.